[지갑 털어주는 기자들] 침묵을 안주로…그와 함께한 싱글몰트
남편은 3월만 되면 분주해집니다. 결혼기념일 이벤트를 고민하느라 말이죠. 벌써 네 번째인데도 그렇습니다. 아, 남자들은 기념일만 되면 초능력이 생기나 봅니다. 언젠가 스치듯 말했던 가고 싶은 곳, 갖고 싶은 것을 기억해냅니다. 그 어려운 걸 말이죠. 그만 읽으시겠다고요? 다행히 글의 주제는 ‘남편 자랑질’이 아닙니다. ‘신혼 탈출 성공기’입니다.

지난 세 번의 결혼기념일을 돌이켜 봤습니다. 그를 믿고 따라간 식당은 너무 유명한 곳이라 시끌벅적했습니다. 정색하고 칼질하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고요. 맞벌이 부부라 예약한 시간에 맞추려 헐레벌떡 뛰어가기도 했습니다. 감동의 눈물 한 방울 정도 흘려줘야 예의인데, 그러지 못했죠.

올해는 큰맘 먹고 제가 챙기기로 했습니다. 고민 끝에 고른 곳은 스피키지바(speak-easy bar). 스피키지바는 1920~1930년대 대공황 여파로 미국 정부가 금주령을 내렸을 때 몰래 술을 팔던 곳입니다. 꽃집, 인쇄소로 위장하거나 간판을 떼고 비밀리에 영업하던 곳입니다. 손님들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이야기했고, 그래서 스피키지바라고 이름 붙었습니다.

국내에도 서울 청담동과 한남동 일대에 수십 곳이 있습니다. ‘볼트’ ‘르 챔버’ ‘루팡’ ‘앨리스’ ‘찰스 H’ 등이 유명하죠. 대부분 비밀스러운 콘셉트로 시작했지만 유명해지다 보니 달라진 곳도 많습니다.

저는 한남동 대사관로의 ‘와이낫’바를 선택했습니다. 스피키지바 중 가장 아지트스러운 곳이랄까. 밤 8시에 문을 열고 새벽 6시까지 영업합니다. 위스키 종류가 많아 경쟁 업소의 바텐더들이 일 끝나고 한잔하러 오는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2층 출입문에는 간판 대신 술이 담긴 글렌리벳 병이 꽂혀 있습니다. 술병을 밀고 들어가면 잘 차려입은 바텐더가 자리를 안내합니다. 기다란 바와 테이블석에 룸도 있습니다. 수십 가지 몰트위스키와 20여가지 칵테일 중 선택하는 즐거움도 있고요. 맥캘란은 ‘희귀템’이라 불리는 레어 캐스크가 많고요. 한 잔 가격은 1만~3만원대까지입니다. 매주 바뀌는 ‘위클리 위스키’는 한 잔 5000원, 한 명이 세 잔까지 즐길 수 있답니다.

와이낫은 ‘왜 안 되냐’는 뜻의 이름처럼 ‘위스키는 왜 무겁게 마셔야 하냐’는 질문에서 시작했다고 합니다. 안 되는 건 딱 두 가지. 시끄럽게 떠드는 것과 합석입니다.

네 번째 결혼기념일, 부부는 각자 좋아하는 싱글몰트 위스키를 양껏(?) 마셨습니다. 별말 않고 편안한 소파에 몸을 늘어뜨린 채. 침묵이 최고의 안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 오니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드디어 ‘이렇게 아무 말 안 해도 괜찮은’ 사이가 됐구나. 이 정도면 성공적 신혼 탈출 아닐까요.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