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기억의 조작
영화 ‘매트릭스’나 ‘토탈 리콜’처럼 인간의 기억을 바꾸는 것은 창작물의 단골 메뉴다. 없는 기억을 만들어 내거나 기존 기억을 지우는 것을 ‘기억 조작’이라고 한다. 학자들은 기존 기억을 지우는 것보다 없는 기억을 만들어내는 게 더 쉽다고 말한다. 이른바 오기억(false memory)이라고 해서 ‘없는 기억’을 생생한 수준까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미국과 유럽 연구팀이 앞다퉈 내놓은 실험결과를 보면 이런 일들이 금방 생길 것처럼 보인다. 얼마 전에도 미국 MIT 과학자들이 생쥐의 뇌에 가짜 기억을 심는 실험에 성공했고 프랑스 연구팀 역시 이를 확인했다. 어제는 신경과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브레인상 수상자들이 “인간이 기억을 완벽히 이해하게 되는 건 시간 문제”라며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와 만난 기억을 뇌에 심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굳이 과학을 동원하지 않아도 우리 뇌는 이미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기억은 입력, 저장, 인출의 과정을 거치는데 어느 하나가 달라져도 전혀 엉뚱한 결과가 나온다. 특히 저장과 인출 과정이 문제다. 인간의 기억이 여러 가지 외부 자극에 쉽게 영향을 받는 것은 조각으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과거의 재구성이나 기억의 왜곡이 일어난다. 미국에서 무죄로 풀려난 사람의 75% 정도가 목격자의 ‘잘못된 기억’ 때문에 투옥됐다는 보고도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괴로운 경험을 잊고 싶어한다. 현재의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 드라마 주인공처럼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정말 그랬다고 확신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원하는 일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구체적인 내용을 상세하게 덧붙이는 ‘상상 팽창(imagination inflation)’의 포로가 되는 경우도 많다.

기억을 지우거나 이식할 수 있다는 것은 감정도 조작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기억과 감정을 담당하는 뇌의 연결 고리를 바꾸면 기억에 대한 감정의 조작이 가능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있다. 더 큰 문제는 집단적인 기억 조작이다. 특정 사회 이슈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대중의 ‘뒤틀린 기억’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야기한다. 지나친 민족주의 성향 같은 조건에서는 더욱 그런 기억조작이 일어난다. ‘아, 만주 벌판!’ 식이라면 중증이다. 정치적 구호로 변질되면 더 복잡해진다. 때론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모아 짜맞추는 단계를 넘어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내는 수준까지 치달을 수도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