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한 홈플러스 그룹 회장

외환위기로 삼성 유통부문 매각
11개월 밀고 당겨 200억 더 받아
파트너측서 능력 인정…CEO 돼
[내 인생 잊지못할 그 순간] "11년전 '협상 포기' 카드로 테스코와 합작 성공"

"이승한 대표가 합작회사 최고경영자(CEO)를 맡지 않으면 계약하지 않겠습니다. "

1999년 5월 영국 테스코 측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 소식을 듣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질타가 이어졌다. "아니,어떻게 처신했기에 테스코에서 자네가 아니면 계약을 안 한다고 하는가. "

그간의 협상과정을 보고했다. "홈플러스 매각 가격은 부동산 가치로 평가한 것이 아니라 저와 경영진이 합작사로 옮겨가 15년간 경영해서 나오는 수익을 현재가치로 환산한 것입니다. 장부가보다 200억원 더 많습니다. 테스코는 제게 많이 당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오히려 그런 사람이 합작사를 맡으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이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건부로 허락했다. "그렇다면 합작회사로 가되 당분간 삼성의 일도 병행하게."

삼성물산은 1997년 외환위기로 부채비율이 600%를 넘어서자 1998년 5월 유통부문의 일정 지분을 매각해 합작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당시 삼성물산 유통부문 대표로 매각 책임을 맡아 세계 주요 유통회사들과 접촉했고 이 중 현지화 경영을 존중해주는 테스코와 협상을 시작했다. 제대로 평가받기 위해 예상 매출과 상품 마진,점포 경비 등 세세한 항목까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협상이 시작된 지 8개월여 만인 1999년 1월 합작을 위한 양해각서(MOU)에 서명했다. 장부가치보다 200억원을 더 받고 점포를 열 때마다 로열티 명목으로 4억원씩 받는 내용이었다. 당시 한국 기업이 헐값으로 외국에 매각되는 분위기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였다. 처음엔 곧 계약을 맺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합의해 놓으면 양측이 번복하고 뭔가 추가로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협상은 다시 답보상태에 빠졌다. 로열티 금액과 일부 자산 평가 방법 등 세부 문제들이 접점을 찾지 못했다. 테스코는 합의금액보다 돈을 적게 지불하려 하고 삼성은 더 받고 싶어했다.

그해 3월 또다시 열린 협상 테이블도 아무런 합의 없이 마무리되는 순간 테스코를 겨냥해 '돌발 발언'을 했다. "만약 이번 안건들에 대해 테스코 측에서 양보하지 않으면 우리는 매각을 포기하겠습니다. "

최후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회의실 분위기가 한 차례 술렁였다. 나는 그 시간부터 48시간 동안 테스코 측의 협상 대표인 마이클 플래밍과 연락을 끊었다.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세상의 모든 협상은 '심리 게임'이다. 테스코 입장에서 이번 협상이 결렬되면 한국시장 진출에 막대한 차질을 빚기 때문에 한발짝 물러나 파국을 면하는 게 나았다.

다음은 삼성에 승부수를 던질 차례였다. 나는 양복 안주머니에 미리 써둔 사표를 넣고 당시 현명관 삼성그룹 부회장을 찾아갔다. "이번에도 타결되지 않으면 저는 협상 대표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협상이란 공정하게 해야 하는 것인데 더 이상 나갈 곳이 없습니다. 이번 협상안 중 단 1%라도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면 깨끗이 그만두겠습니다. "

피말리던 막바지 협상은 이렇게 해서 급물살을 탔다. 모든 계약 조건이 마무리될 즈음 테스코에서 합작사 CEO를 맡아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제안을 받자 도전하고 싶은 열망이 일었다. 그동안 삼성물산에서 마케팅,감사,회계,금융,건축,개발,신사업 기획 등 다양한 업무를 한 것이 유통업을 하기 위한 수련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이 회장의 허락으로 매각 협상을 벌인 지 11개월여 만인 1999년 5월15일 합작사 삼성테스코가 탄생했다.

시간이 흘러 삼성테스코는 올해로 창립 11주년이 됐다. 업계 꼴찌 수준이던 대형마트 홈플러스는 창고형 할인점에 머물던 국내 유통업계에 문화센터 운영 등 소비자들에게 백화점 수준의 서비스와 가치를 제공하는 새로운 컨셉트의 점포를 선보이며 업계 선두권에 올라섰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유통물류시설인 목천 물류서비스센터를 건립하는 등 유통업계의 물류혁신을 주도하고 국내 최초로 친환경 점포도 선보였다. 당시 지루하게 이어지던 협상과정에서 포기했더라면 지금의 홈플러스와 국내 유통산업은 어떤 모습일까. 사표를 품고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던 그날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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