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신세계 부회장(41)은 1995년 12월1일 신세계 전략기획실(현 경영지원실)로 첫 출근할 때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날 아침 집을 나서기 전 어머니 이명희 회장으로부터 들은 '행동지침'은 여태껏 그의 회사 생활에 좌우명이 됐다. "나서지 말고 항상 남의 말을 경청하세요. 겸손하게 무조건 배운다는 자세로 (회사 생활에) 임하세요. "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지난달 말,그는 이 회장으로부터 새로운 지침을 받는다. "경청하되 이젠 듣지만 말고 그동안 보고 배운 것을 소신껏 행동으로 옮겨보세요. "

정 부회장이 지난 1일 신세계 총괄 대표이사(CEO)에 오르면서 신세계는 본격 '정용진 시대'를 맞게 됐다. 그가 현 시점에서 경영전면에 나서게 된 데 대해 신세계 임직원들은 "퍼펙트 타이밍"이라고 표현한다. 한 임원은 "지난 10년간 전문경영인 체제로 회사 기틀을 다졌다면 이제는 오너가 책임지고 장기적 관점에서 글로벌 유통기업으로의 도약을 위해 과감하게 투자할 때"라고 '정용진 시대'의 의미를 설명했다.


◆삼성가(家) 엘리트코스 밟은 3세

정 부회장은 삼성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의 외손자로,삼성가의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경복고를 나와 1987년 서울대 서양사학과에 입학한 뒤 1학년만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동부 명문인 브라운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국내 대학에서 인문학을 맛본 뒤 해외에서 경제 · 경영 등 실용 학문을 공부하는 삼성가의 교육코스를 그대로 밞은 셈이다. 1994년 귀국한 뒤 일본 회사 시스템을 경험해 보라는 어머니 이 회장의 조언에 따라 후지쓰코리아 유통사업부에서 1년간 일했다. 정 부회장이 단품관리,발주시스템 등 IT(정보기술)을 유통업에 접목시키는 데 남들보다 빨리 눈을 뜬 것도 이때의 경험 덕이다.

그는 재계 2~3세들과 '호형호제'하며 폭넓은 교분을 쌓고 있다. 특히 사촌인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와는 경복고 동창이자 서울대 87학번 동기로 재계에서 소문난 '절친'(절친한 친구)이다. 최재원 SK E&S 부회장(46)과 김준 경방 사장(46),조현상 효성 전무(38) 등은 브라운대 동문으로 가깝게 지낸다.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37)은 경복고 4년 후배이자 정 부회장의 매제인 문성욱 신세계I&C 부사장(37 ·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의 남편)의 친구이기도 해 한층 친분이 두텁다.


◆전문가 식견 갖춘 '유통 고수'

정 부회장은 신세계 입사 이후 상품,물류,시스템 등 유통업 전반에 걸쳐 전문가적인 식견과 안목을 키우는 데 주력해 왔다. 1997년 초까지 도쿄사무소에서 근무하며 일본 유통현장을 체험했고,그 이후에도 경영지원실 상무로 일하며 수시로 이온,이토요카도 등 대형 유통업체를 찾아가 매장 진열과 인테리어,신선식품 개발 · 관리 기법 등을 배웠다. 이런 노하우는 한창 성장하던 이마트에 고스란히 전수됐다.

2006년 부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그의 시야는 전 세계로 넓어졌다. 최근 1년간 방문한 국가만도 중국,일본을 비롯 미국,캐나다,독일,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스웨덴 등 10여개국에 이른다. 영국 테스코 등 글로벌 유통기업들이 새로 낸 점포를 방문해 매장집기,진열,인테리어부터 화장실 구석구석까지 살펴보거나 PL(자체상표 · Private Label)상품박람회 등을 둘러보는 것이 해외 출장의 주된 일정이다. 정 부회장은 "나만큼 고객 시각에서 해외 선진 유통매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분석하고 연구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자부한다.

그의 '학습'은 이마트나 신세계백화점에 리얼타임으로 반영돼 왔다. 특히 2007년 '가격 혁명'을 촉발한 이마트의 대규모 PL 상품 출시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는 PL로 출시되는 거의 모든 상품을 직접 먹어보거나 사용해 볼 정도로 PL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지난해 9월 이마트 애견사료 PL상품이 출시됐을 때는 직접 매장에서 구입해 집에서 기르는 6마리의 애완견에게 먹여 보고는 모든 애완견이 먹기 싫어한 두 제품은 진열대에서 빼도록 했다.


◆스타벅스 마시고 피아노 연주까지

정 부회장은 고객 입장에서 수시로 매장을 꼼꼼하게 살피는 '시어머니' 역할을 해왔지만,그렇다고 성격이 까탈스러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너답지 않게 소탈하고 직원들과도 허물없이 지낸다"는 게 주위의 평가다. 직원들과 수시로 삼겹살에 소주잔을 기울이고,이마트 각 점포의 개점 고사에도 자주 참석해 흥겹게 막걸리잔을 돌린다. 또 신입사원에게도 늘 경어를 사용해 "소양교육을 잘 받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정 부회장은 무엇이든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 2004년 의사의 권유로 허리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한 뒤 매일 2시간씩 매달린 끝에 지금은 보디빌더 수준의 몸을 만들었다. 최근 그가 가장 정열을 쏟는 취미생활은 피아노 연주다. 클래식 감상을 즐기다 2년 전 문득 '직접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는 데도 모차르트와 쇼팽의 소나타곡들을 연주할 정도로 수준급 실력을 쌓았다. 요즘은 주로 퇴근 후 혼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피로를 씻는다고 한다.

초등학생인 두 자녀와 함께 봉사활동에도 열심이다. 지난해 2월부터 아이들과 함께 매달 한 번씩 중중 장애아동시설이나 독거노인요양원 등을 방문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정 부회장은 미국 유학시절부터 스타벅스 커피맛에 푹 빠졌다. 요즘도 하루에 스타벅스 아이스커피를 '그란데 사이즈'(473㎖)로 두 잔 이상 마신다. 그의 '스타벅스 사랑'은 비즈니스로까지 발전했다. 정 부회장의 주도로 신세계는 1997년 미국 스타벅스와 50 대 50으로 출자해 스타벅스코리아를 설립했다. 스타벅스는 현재 300여개 매장을 보유한 국내 최대 커피전문점으로 성장했다.


◆총괄 대표직은 '마지막 관문'

정 부회장은 총괄 대표에 오른 것에 대해 이 회장으로부터 합격점을 받았다기보다는 후계자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 회장은 현재 신세계 최대주주(지분율 17.30%)로 정 부회장에게 아직 지분을 물려주지 않은 상태다. 정 부회장은 2006년 9월 부친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으로부터 4.46%의 지분을 물려받아 현재 7.32%로 2대 주주다. 이 과정에서 낸 2200억원의 증여세는 아직까지 국내 최대 규모다.

정 부회장은 총괄 대표 내정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업(業)의 본질'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가 생각하는 유통업의 본질은 세계 일류 유통기업들처럼 소비자들에게 다양한 업태로 다가가 좋은 품질의 상품을 값싸게 공급해 그들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유통업의 본질에 충실하는 것만이 신세계가 한 단계 도약을 이루는 동시에 후계자로서 최종 합격점을 받을 수 있는 최선책이란 생각이다.

그러나 신세계가 처한 상황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다. 정 부회장이 "변곡점에 와 있다"고 표현한 이마트는 성장과 정체의 갈림길에 서 있고,중국 이마트 사업도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그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지만 돌파할 방법도,자신도 있다"고 강조한다. 그동안 체계적인 경영수업을 받으며 '내공'과 '소신'을 키워온 정 부회장이 '신세계호'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 주목된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