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겨우 일주일 머물렀을 뿐인데도 한국의 얼큰한 라면 국물맛이 생각나더군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컵라면을 시켜 먹었습니다. "

브래들리 벅월터 오티스 엘리베이터 코리아 사장(45)은 영락없는 한국인이다. 입맛과 말씨만 그런 게 아니다. 한국인의 습성과 사고방식에 완벽하게 동화돼 있다.

'싼게 비지떡' '온탕냉탕(溫湯冷湯)' 같은 표현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을 보면 도저히 외국인으로 볼 수가 없다. 대화 도중 '그러면 열받지 않겠어요'라고 말하는 표정에 이르러서는 능글맞다는 느낌마저 든다.

요즘 그의 유일한 고민은 영어실력이 자꾸 준다는 것이란다. 우스갯소리라고 넘기기에는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미국 출장길에 입국장에 서면 영어와 한국어가 동시에 튀어 나와요. 그러면 공항 직원들이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요. "

햄버거에서 소주와 김치로

벅월터 사장이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83년.미국 유타주의 브리검 영대 1학년(국제관계학 전공) 때였다. 해외 선교봉사를 지원하면서 제비를 뽑았는데 운명처럼 '한국'이 나왔던 것.그때까지 벅월터 사장이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6 · 25 전쟁'과 '미국 군인들이 덥고 추운 날씨에 고생하는 나라' 정도였다.

1983년 12월 처음 정착한 도시는 경상남도 통영이었다. 선교지역으로 배정된 곳이었다. 외국인이 거의 없던 낯선 도시에서 혼자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은 찾아볼 길이 없는 '거북아파트'에 여장을 풀자마자 맞닥뜨린 어려움은 샤워시설이 없다는 것.10분 거리에 있는 대중목욕탕을 매일 왕래하며 한국인 삶의 방식을 익혀 나갔다. 햄버거를 먹으려고 부산까지 매주 직행버스를 탔던 미국 청년이 김치와 소주의 맛에 길들여지는 데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통영 사람들도 서글서글한 인상의 외국인에게 마음을 열고 대했다. 한번은 모내기 일손 돕기를 마친 뒤 봉고차를 몰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차가 논두렁에 빠졌다. 혼자 힘으로 어쩔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자 마을 사람들 30여명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한 시간여를 매달린 끝에 봉고차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벅월터 사장은 "미국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친절이었다"며 "그 후 18개월 동안 대구 포항 울산 목포 전주 등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어디를 가도 인정이 넘쳐 한국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말했다.

1985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 대학과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친 뒤 미국 코네티컷주에 있는 오티스 본사에 편지를 썼다. 해외 경험을 살려 오티스의 글로벌 영업맨으로 일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것.오티스는 뜻밖에도 별도의 면접 절차 없이 그에게 합격 통지서를 보냈다. 근면한 직장인을 많이 배출하기로 이름난 브리검 영대 출신인 데다 해외 지향적인 자세를 높이 평가했다는 후문이다. 1990년 첫 근무지는 싱가포르였다.

"해외 근무를 자주 하다 보면 한국에도 다시 갈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역마살이 낀 팔자 같아요. "

농구에서 배운 승부근성

어렸을 적 벅월터 사장의 꿈은 농구선수였다. 대학 입학 전까지만 해도 캘리포니아 지역 강호인 포크케이브맨 고교에서 주전 포워드로 뛸 정도로 빼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어린 시절 10여년간의 농구선수 생활은 승부근성을 길러줬다. 농구를 하기에는 키(185㎝)가 작은 편이었지만 빠른 스피드로 2m가 넘는 장신 선수들을 제압했다. 게임이 끝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찰거머리 같은 철벽 수비에 상대팀 선수들은 혀를 내두르곤 했다. 벅월터 사장은 "키가 큰 사람은 스피드가 떨어진다"며 "경기시간이 1초라도 남아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상대를 박살내는 게 주 임무였다"고 돌아봤다. '박살'이라는 단어를 외국인에게 듣는 것은 무척 생경했다.

이렇게 길러진 승부근성은 회사를 경영하는 데도 그대로 접목됐다. 2004년 대구 수성구에서 건설 중인 한 아파트 업체로부터 난감한 부탁을 받았다. 최소한 6개월은 걸리는 엘리베이터 설치공사를 40일 안에 마무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40여명의 건설현장 직원들과 함께 주말과 공휴일을 반납한 뒤 야간근무도 마다하지 않고 작업에 매달렸다. 현장 직원들에게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독려한 끝에 시일 내에 공사를 끝냈다. 김길수 오티스 이사는 "벅월터 사장은 '불가능이란 세상에 없으니 일단 도전하라'며 직원들을 독려해 고객들이 원하는 성과를 이끌어내는 데 탁월하다"며 "농구선수 시절 배웠던 팀플레이를 회사 경영에서도 강조한다"고 설명했다.

비즈니스 구조를 바꾸다

싱가포르와 일본 근무를 마친 벅월터 사장이 한국오티스의 재무담당 임원으로 발령받은 것은 1994년이었다. 이후 15년간 한국법인에서 일하면서 가장 중점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사업 개념을 바꾸는 일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엘리베이터 비즈니스의 주된 사업영역은 말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파는 것이었다. 엘리베이터 수명이 다하거나 잦은 고장으로 5~10년에 한 번씩 새로운 모델로 교체하는 시장을 노리는 것이었다. 품질 불량으로 고장이 나면 날수록 회사의 부품 판매가 늘어나는 기형적인 구조였다.

벅월터 사장은 이런 구조로는 엘리베이터 산업이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한국 시장에 처음으로 '종합보험' 개념을 도입했다. 엘리베이터를 처음 팔 때 돈을 조금 더 받는 대신 고장이 나면 무료로 계속 고쳐주는 시스템이었다. 처음엔 거래처의 반응이 탐탁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초기 도입 단가가 비싸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시장의 반응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티스의 철저한 유지 · 보수 시스템에 만족한 호텔과 주요 건물주들이 새로운 건물을 지을 때 오티스를 찾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표적 랜드마크들도 오티스 제품을 속속 채택했다. 교보생명 흥국생명 웨스틴조선 등 광화문의 주요 건물들과 높이가 305m에 달하는 인천 송도 국제업무단지 내 동북아시아 트레이드 타워,서울 여의도 국제금융센터,경기도 동탄 메트로폴리스,서울N타워,한국종합무역센터 등이 대표적이다. 올초에는 청와대 내방객 사무소인 '연풍문'에 엘리베이터를 납품하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 4만5000여대에 불과했던 오티스의 점검 대상 엘리베이터는 지금 13만5000대 규모로 증가했다. 벅월터 사장은 "고객들이 원하는 것은 고장이 안나는 엘리베이터인데,고장이 잦을수록 돈을 번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오티스코리아는 한국 기업"

벅월터 사장은 타고난 친화력을 바탕으로 아직도 영업일선에서 뛰고 있다. 손에는 항상 스마트폰인 블랙베리가 쥐어져 있다. 지인들로부터 오는 이메일과 문자메시지에 곧바로 응답하기 위해서다. 지난 6월 국내 승강기 단일 프로젝트 중 최대 규모인 서울국제금융센터(SIFC) 엘리베이터를 수주할 때도 실무자들을 직접 만나 설득했다. 외국인 친구들과는 수요일 저녁마다 만나 농구를 한다. 이렇게 쌓은 인맥은 오티스가 엘리베이터를 수주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처럼 다정다감한 벅월터 사장이지만 "한국 기업들이 왜 미국 엘리베이터 회사에 좋은 일을 시켜주느냐"는 시장 일각의 '비토' 분위기에 대해서는 정색을 했다. 4000여명의 임직원 중 외국인은 자신을 포함해 2명에 불과하고,매출의 상당 부분을 수출로 채우고 있는데 왜 외국 기업이냐는 반문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정말 그러면 안돼요. 품질과 서비스로 승부해야 합니다. " 벅월터 사장은 한국을 '우리나라'로 지칭했다.

박민제 기자 pmj5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