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어른들 말씀에 ‘새집을 짓고 3년 넘기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철이 들고 어른이 돼가면서 차츰 수긍이 가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새집을 짓는다는 것은 사람이 살기 위한 터전을 마련한다는 외에 온갖 미물이 살던 터전을 빼앗는 일이 된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해치는 일임이 분명하다. 또 집을 짓다보면 금전적으로 무리를 하게 되는 수가 흔하고 정신적으로도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자연히 심신이 고달프게 되고 병에 걸리기 쉽다. 인간이 하찮게 여기는 미물들의 원성(?)이 때로는 적잖은 부작용을 초래케 한다는 것이다.

30년 전, 흉가로 소문난 집이 있었다. 팔기 위해 내놓았으나 누구하나 거들떠보는 이가 없었다. 그 소문을 듣고 모 종교 단체에서 그 집을 사들였다. 15년 전 필자도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소문대로 그 집에서의 잠자리가 편치 않았다. 가위에 눌려 숨이 막히는 등 밤새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다음 날 그 집의 내력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 집의 원래 주인이었던 한 법조인부부가 이집의 건축 비용을 마련하기위해 계를 했다가 계가 깨지면서 큰 빚을 떠안게 되었고 자살에 까지 이르고 만 것이다. 그런 사정을 알고 나서 그 집을 관리하고 있던 분과 상의해서 고인들의 명복을 빌어주는 천도제를 올려 주기로 했다. 혼령을 위로하고 그들의 영면이 편하기를 빌어 주었다. 그 후 그 집터에 큰 교당(敎堂)이 들어서게 되었으며, 많은 이들의 정신적 안식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인간의 삶에는 보이지 않는 연(緣)이 있게 마련이다. 당장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이는 일일지라도 사람이 돌아서면 상당한 부피와 무게로 다가서는 경우가 없지 않다.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일단 ‘나’와 만난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일 수밖에 없다. 한줄기 바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기 위해 우주는 섭리로 작용했음을 가끔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렇다며 명당이란 무엇이까. ‘명당’이란 한자로 쓰이는 말인데 조상의 묘자리나 집터를 이곳에 잡으면 후손이 크게 흥한다는 고대의 전통사상에 기인하는 이야기다.
명당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집착은 예나 지금이나 정도를 넘어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명당을 잡기 위해 부모 조상의 묘를 어느 모처로 이장을 한 신흥갑부가 있다느니, 전 고위인사의 조상 무덤이 경상도 땅의 어느 산 밑인데 그곳이 옛날부터 명당으로 지목받았던 곳이었다느니, 아예 선거의 계절이오면 조상묘 이장이 심심치 않게 보도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돈깨나 있고 권세 한 번 누려 본 집안치고 이러한 명당자리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 있겠는가. 또한 자신이 수를 다하면 남쪽으로 난 건조한 산마루에 단정한 맵시의 무덤 자리, 그곳에 묻히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예로부터 소위 명당자리를 신들린 듯 보는 명지관치고 명당의 조건에 반드시 적덕(積德)과 인행(人行)을 강조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쉽게 말해 오직 좋은 땅만을 잡아주고 ‘이곳에 당신의 부모님, 또는 조상들의 시신을 안장하면 후손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다.’라고 말하는 지관들은 대체로 우주만물의 생성원리와 운용법칙 그리고 그에 따른 인간의 해야 할 바에 대해 깊은 인식이 없는 2류 3류 지관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서울대학교 C교수가 한국의 풍수지리설에 대해 현대학문으로 쉽게 과학적으로 풀이해 놓은 연구서를 내놓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 적이 있다.
그가 ‘땅속에 흐르는 물줄기를 보는 이상한 경험’을 한 후 그는 자연과 땅과 이 지구가 하나의 생명체라는 확신을 가지고 지리학에 몰두했다 하는데, 그가 현대 지리학의 높은 지혜를 가지고 풀이한 소위 명당의 개념도 물리적 지리학적인 조건과 더불어 명당을 찾고 또 그곳에 묻히는 사람의 생전 행동, 적덕의 유무 등이 주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내게 자못 진지하게 “어디 명당자리 하나 없습니까?”하고 물어보는 분들이 많다. 그분들의 얼굴을 뵈면서 “먼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을 베푸시고 차분히 생을 정리, 주위의 칭찬을 듣는 게 더 급합니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터와의 좋은 인연이 명당이라면 그보다 사람과 사람간의 좋은 인연이 더 우선되지 않겠는가(hoo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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