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한국전쟁의 혹독한 시련을 겪고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로 복귀한 대한교과서는 경영압박에 시달려 회사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됐다. 그러던 끝에 희망이 생겼다. 정부로부터 수익성이 높은 국어교과서 발행권을 부여받았다. 실업계 교과서 생산을 지속하기 위한 긴급 수혈이었다. 60년대 들어 회사가 다소 안정을 찾자 김 회장은 일본과 독일에서 새 인쇄기를 도입,시설을 보강하고 사업다각화를 시도했다. 주력 사업인 교과서부문의 외형은 꾸준히 성장했다. 66년 1백6종(실업계 90종) 2백34만부까지 늘어난 생산량이 69년엔 2백21종(실업계 1백83종) 3백30만부로 급증했다. 김 회장은 교과서 발행이후 휴지기에 들어가는 인쇄시설 활용도를 극대화하기 위해 '어문각'을 설립,다양한 아동도서와 국어사전 영한대사전 등을 발간했다. 특히 당시 출판사들이 손댈 엄두도 못냈던 '신영한대사전' 발행은 사서의 대형화를 선도한 쾌거였다. 김 회장은 이 책이 완성됐을 때"하면 할 수 있다!"고 감격의 일성을 터뜨렸고,이는 90년대 말까지 대한교과서의 사훈이 되기도 했다. '신한국문학전집(51권)''과학기술용어집'등의 발행도 압권이었다. 그러나 어문각은 뒷날 김 회장이 제9대 국회(1973년)에 등원하면서 선거빚을 갚기 위해 매각해야 했다. 그는 "내가 진 빚을 갚는데 선친이 물려준 회사를 건드릴 수 없어 분신같은 어문각을 처분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또 우석 선생이 창간한 '소년'의 후속 잡지 '새소년'을 1964년 창간,7개월 만에 2만부를 찍을 만큼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이 잡지는 80년대 들어 재벌기업들의 출판계 진출로 타격을 받고 1989년 종간됐다. 이같은 사업다각화 노력에도 정부의 가격 통제와 간섭으로 대한교과서의 앞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특히 실업계 교과서는 흑자를 갉아 먹는 주요 요인이었다. 김 회장은 자금난과 일거리 부족,교과서 적기 공급을 맞추는 문제로 늘 고민이었다. 은행 앞에서 서성거리는 초라한 자신을 보며 눈물을 흘린게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꽃을 사들고 새로 부임한 교육부 관계자의 집으로 인사를 갔지만 세번이나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화가 나 꽃을 집안으로 내던져 놓고 돌아왔더니 이틀 만에 만나자는 연락을 받은 일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다시 생각해 보면 무모한 배짱이었습니다.하지만 당시엔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심정으로 덤볐죠." 그는 사업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마침 시장이 활황세를 보이던 증권투자에 손을 대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고,그 여파로 회사는 은행관리에 넘어가게 됐다. "자살까지 생각했지요.사채업자들에게 끌려가 온갖 수모를 겪고 목숨을 위협받기도 했습니다." 김 회장은 그 때 "날 죽여서 돈이 나올 수 있다면 죽여라.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내가 다시 일어나 수년 안에 모두 갚겠다"고 채권자들에게 약속했다.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그는 실패한 사업가로 남지 않기 위해 그 날의 기억을 가슴속에 묻었다. 그리고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재기 의지를 다졌다. 최규술 기자 kyus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