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구와 이혜정이 전철역 층계를 막 내려갔을 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급하게 층계를 뛰어내려오는 듯하더니 "앗" 하는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동시에 비명이 들리는 곳에 시선을 주었다.

어느 젊은 여자가 층계 바로 밑 그들 옆에 나뒹굴어졌다.

여자는 얼른 일어나면서 떨어뜨린 핸드백을 주우려다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바로 김명희였다.

이혜정이 얼른 김명희에게 다가갔다.

"명희야,무슨 일이야?"

"어머,언니세요? 어디 급히 가려다가 층계에서 누구하고 부딪쳤어요"

김명희가 고통 속에 말했다.

"어디 가는 길이야?"

"서울 시경에요. 제 동생이 거기 잡혀 있다고 연락이 왔어요. 데모를 했대나봐요"

고통스럽게 말하는 김명희를 이혜정이 부축해서 일으켰다.

김명희가 이혜정의 부축을 받으며 몇 발짝 걸으려다 더 걷지 못하고 이혜정에게 기대었다.

"병원부터 먼저 가봐야겠어.걸을 수도 없잖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럼 나하고 같이 가"

다시 김명희를 부축하며 이혜정이 진성구를 향해 말했다.

"저는 얘하고 시경으로 가야겠어요"

"나도 같이 가지.지금 시간에 택시 잡기도 힘들어.전철로 가는 게 더 쉬울 거야"

진성구가 김명희를 다른 한쪽에서 부축하여 개찰구 쪽으로 갔다.

시경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김명희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강 들었다.

지방 대학 4학년에 재학중인 김명희의 남동생이 서울대 교정에서 열린 불법집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에 의해 그곳에 참석한 학생들과 함께 연행되었다는 것이다.

평소 그렇지 않아도 사회혼란을 부추기는 운동권 학생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마땅찮아 했던 터라 진성구는 당장 그들과 헤어지고 싶었으나,이혜정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찜찜한 마음이지만 같이 가는 수밖에 없었다.

서울역에서 내려 층계를 올라갔다.

김명희는 걷는 데 다소 고통이 덜해진 것 같았다.

발목을 심하지 않게 삐인 것 같아 두 사람이 양쪽으로 부축하여 걸어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는 듯했다.

그들 세 사람은 서울역 청사 건너편에 위치한 서울 시경으로 가 그곳 면회실로 들어갔다.

꽤 넓은 면회실이 꽉 찰 정도로 보호자들이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

진성구는 면회 신청하는 곳으로 가 김명훈의 보호자로서 담당형사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잠시 후 김명훈은 죄질이 나빠 구속될 것 같다는 담당형사의 말을 들은 진성구는 두 여자에게로 갔다.

담당형사와 나눈 대화 내용을 전해주었다.

김명희는 과거 그런 경험이 많아서인지 별로 낙담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두 사람에게 그냥 안심하고 가라고만 했고 이혜정은 자기가 김명희하고 있을 테니 진성구더러 가라고 했다.

진성구도 이혜정이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무턱대고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발목을 다친 여자를 혼자 그곳에 두고 그냥 가자고 이혜정에게 말할 수도 없어 난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