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근 <은행감독원 신용감독국장>

한보 기아 등 대기업의 연이은 부실화는 금융기관들의 존립기반을 크게
흔들어 놓았으며 급기야는 우리 금융-경제 전체를 미증유의 위기상태로
몰아 넣었다.

숨돌릴 틈도 없이 벌어지는 외환시장 혼란, 자금시장 경색, 그리고
주식시장 붕괴의 악순환은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과 고통 그 자체였다.

이와 같은 고통과 위기의 사태를 접하면서 우리는 은행과 기업간
바람직한 관계 재정립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은행과 기업간의 관계는 주된 거래관계가 있는 은행, 즉 주거래은행과
대기업간의 관계로 축약할수 있겠으며, 주거래은행제도의 전형적인 모델은
일본의 예에서 찾을수 있다.

일본의 주거래은행 제도는 1920년대부터 관행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주거래은행들은 거래기업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안정적으로
자금을 공급해주었고, 기업은 이를 바탕으로 안심하고 경영에 전념할수
있었다.

또한 주거래은행들은 기업주식의 소유자 내지는 최대 채권자로서
기업경영에 대한 감시와 조언을 충실히 함으로써 거래기업의 안정적인
성장을 지원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감독당국 주도아래 대기업에 대한 중복여신 억제와
재무구조개선 지도를 목적으로 지난 74년에 주거래은행제도가 도입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경우와는 달리 지분참여를 통한 주거래은행의 기업지배는
없었다.

70년대 종반부터는 대기업에 대한 재무구조 개선보다는 경제력집중완화와
부동산투기억제 등 정부의 산업정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대행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왔으며, 이와 같은 주거래은행의 역할은 90년대
초반까지 큰 변화 없이 지속되어 왔다.

94년에 규제완화조치의 일환으로 주거래은행의 기업투자및 부동산투자
승인제도가 부분적으로 폐지된 것을 시작으로 주거래은행의 기능은 일대
전환을 맞게 되었으며, 지난 8월에 주거래은행의 10대 계열기업군에 대한
부동산투자승인제 등을 폐지함으로써 대기업에 대한 주거래은행의 직접규제
기능은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은행-기업간의 관계는 어떤 형태로 새롭게 형성되어야 하는
것인가.

첫째 기업에 대한 최대 채권자로서 은행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한다.

은행은 예금자의 예금을 기반으로 해서 채권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역할 강화는 예금자로부터 위임받은 감시자(delegated monitor)
로서의 성실한 의무수행과 자율적으로 형성된 채권-채무 관계에서 그 근거와
명분을 찾을수 있다.

은행의 최대 채권자로서의 역할은 구체적으로 기업투자활동에 대한 통합적
모니터링을 통해 수행될수 있다.

통합적 모니터링이란 여신심사 단계에서의 사전적 모니터링, 투자실행
단계에서의 중간적 모니터링, 그리고 사후적 모니터링을 총칭하는 말이다.

은행의 기업활동에 대한 통합적 모니터링의 중요성은 차입위주의 경영이
일반화된 우리 풍토에서는 은행차입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기업경영이
방만하게 흐를 가능성이 크고, 또 은행이 기업에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서도 찾을수 있다.

따라서 차주기업에 대한 은행의 실효성있는 모니터링을 위해서는
여신거래특별약관(special covenant)의 활성화와 여신심사에 대한 전문성
제고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둘째 은행에 대한 기업의 적극적인 협조 또한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자금조달 수단이 다양화되고 제2금융권의 비중이 높아졌다 하더라도
은행은 여전히 안정적으로 자금을 공급해주는 제일의 자금원이다.

기업이 은행의 모니터링에 적극 협조하는 것은 기업의 투자활동을
객관적으로 검증받는다는 면에서나, 은행과의 돈독한 신뢰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이는 결국 기업에도 보탬이
되는 것이다.

셋째 주거래은행을 중심으로 은행간 긴밀한 협조체제가 구축되어야 한다.

기업의 여신이 여러 은행에 분산돼 있는 상황에서는 여신은행들의
협조없이는 기업에 대한 통합적 모니터링의 실효성은 기대할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발생한 대기업 부실화의 공통요인은 무리한 사업다각화와 투자,
그리고 과다한 차입금에 기인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기업 스스로에 있지만, 금융기관이 자금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이와같은 무리한 투자가 이루어질수 없었다는 점에서
금융기관들의 책임도 면할수 없을 것이다.

최근의 사태에서 우리는 기업 부실화의 누적이 금융기관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며 금융기관이 부실화되었을 때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를 분명히
보았다.

자율에 기초한 은행의 기업경영 지도와 기업의 적극적인 협조, 그리고
여신은행들간의 공조체제 확립이야말로 은행도 살고 기업도 사는 길이며
나아가 국가경제 전체를 살리는 길이라 할수 있겠다.

은행과 기업은 공생공사하는 관계에 있다는 점을 다시한번 명심해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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