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그 변호사사무실에 전과자를 들여보내서 도난을 당한 것처럼
서류를 헝클어 놓고 몇가지 물건을 훔치는 것이다.

007의 수법까지 생각하다가 임변호사는 실소를 터뜨리고 만다.

그런 방법들은 모두 범죄이기 때문이다.

법을 알면 범법이 어렵다.

"이겨만 줘. 이것은 당좌수표 오백만원이다. 이기겠다는 의지가 있으면
이기고 의지가 없으면 지는 것이 소송사건 이더라구"

"맞습니다. 윤효상 이 친구는 지금 부당한 위자료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도 시간을 끌고 싶지 않습니다"

문제는 영신이 쇠고랑을 안 차도록 하는데 있다.

물론 이 사건은 시간을 끌면 승소할 수 있다.

적어도 부당한 위자료는 안 줄 수 있다.

법이란 상식이고 상식처럼 우월한 것은 없다.

"나쁜 방법으로 이기지는 말게. 그것은 비겁하니까. 이겨도 지는 것과
같아"

"알고 있습니다. 제 후배가 지금 그 변호사 밑에서 사무장으로 있어서
여러 정보를 얻고 있습니다.

가장 정당한 방법으로 승소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돈은 사용하지 않으면 돌려드리겠습니다.

미리 필요해서 청구한 것입니다"

그들은 맛있는 헤즐러 커피를 마시면서 서로의 건강과 행운을 위해
축복을 빌며 헤어진다.

김치수 회장은 틈만 있으면 강변 드리이브를 하는데 그것은 건강을 위해
비싼 보약보다 나은 방법이다.

그는 70노령이지만 건강했고 오래 살고 싶다.

다만 이 많은 재산을 제대로 물러주려면 외딸인 영신에게 똑똑한 남편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초조함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는 영신이 걱정스러운 아이다.

마음이 착하고 결이 고운 여자나 남자는 그래서 갖고 있는 결점들이 아주
많다.

욕심과 야망이 없고 집념이 약하고 너무 낭만적이고 오피셜하지 못하다.

바로 영신이 그렇다.

"우리딸 애는 아주 착한데, 어디 좋은 신랑감 없을까? 변호사면 더
좋겠어. 자네가 좀 구해줘. 두번이나 결혼에 실패했으니 이제는 내가
나서서 성공적인 결혼을 시켜야 할 것 같아. 안 그런가? 여러모로"

그는 굳은 결의를 표하며 임변호사의 손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자기의 일을 위해서는 언제나 이렇게 철두철미하다.

그것이 그의 성공 비결이라고 임변호사는 감탄한다.

그런 점이 바로 배울 점이다.

강변까지 안 나와도 될 수 있는 만남이지만 그는 그렇게 여유있고
싱그러운 공간을 즐기면서 비즈니스를 해치운다.

모든게 능률적이고 상쾌하다.

임변호사는 서초동 사무실에서 늘상 인간공해와 사건공해에 찌들어
늙어간다.

그렇게 답답하게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몸을 망치게 하는가? 그린을
보고 푸른 강을 보며 숨쉬어야 된다.

그들이 말을 끝내고 미사리의 고속화도로를 질주할때 마주 스치는 재규어
자가용 속에는 윤효상과 미스 리가 타고 있었다.

미스 리는 사표를 냈고 윤효상은 그녀에게 결혼을 약속해주었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이번 아이는 없애자는 것이다.

서로 못 보고 지나쳤지만 그들은 그렇게 운명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