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담요를 뒤집어 쓰고 있는 그녀에게 삐삐가 온다.

그녀는 실색하며 스위치를 끈다.

그리고 그 장본인이 지영웅 코치라고 그녀는 직감한다.

그러면서 하루도 안 된 시간에 삐삐를 하는 그의 성급함에 실망한다.

그는 아직 혈기왕성한 20대니까 라고 이해를 하면서도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너무도 난처하다.

윤효상은 직감적으로 그 삐삐를 보낸 사람이 남자이고 영신의 단호함으로
미루어 새로운 남자가 아닌가 추측하며 가슴이 쓰리다.

그는 미스 리를 건드렸지만 마음은 언제나 영신을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녀처럼 상냥하고 지적이고 우아함을 지닌 여자는 드물었다.

미스 리는 젊었어도 영신보다 더 신선하고 기품있게 행동하지 못한다.

그녀처럼 우아하고 달콤하게 웃지 못 한다.

그녀는 어머니인 최여사를 닮아 천상의 비너스처럼 고결하고 조용하다.

지금도 장모인 최여사는 침묵속에서 그가 이 방을 나가기를 재촉하고
있다.

그 침묵이 어떤 때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 같지만 상대하기는 참으로
편하고 기품있는 사람들이다.

그는 그들 가족과의 관계를 끊고 여기를 떠나는 것이 정말 싫다.

그러나 이미 미스 리의 존재는 암초처럼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다.

절망적인 무게로 그를 괴롭히고 있다.

젊은 육체를 탐닉했던 그는 지금 그 벌을 받아야 하는데도 이 집을
나가기가 싫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문밖을 나서면 그대로 지옥일 것만 같다.

모든 것이 일시에 소리를 내며 무너질 것 같은 공포가 그를 짓누른다.

"저는 영신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것은 깨끗이
정리하겠습니다. 영신이 하자는대로 하겠어요"

"윤서방, 지금 나는 편하게 잠들고 싶을 뿐이네. 이야기라면 내일함세.
그리고 자네 장인은 나에게 그런 스캔들을 일생 보여준 일이 없어서 내가
너무 힘드네. 자, 어서 올라가 쉬게. 얘는 오늘밤 나와 잔다니까"

그녀는 문을 열어주면서 그에게 나가 주기를 종용한다.

아직 장모가 이렇게 냉정하게 문을 열고 나가라는 제스처를 한 일은
없었다.

항상 성모마리아처럼 웃으면서 사위를 백년손님처럼 정중히 대해주었다.

가장 자연스럽고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그런 여자였다.

그는 마지못해 장모의 방을 물러나면서 눈물이 글썽해진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그럼 내일은 꼭 시간을 주십시오"

윤효상은 아내의 허리에 찬 삐삐가 또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장모님의 정결한 한식 방을 나온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서러움이 그를 울게 한다.

그리고 새삼 어떻게 자기의 장인은 아들없이도 그렇게 유연하게
살아왔을까.

존경하는 마음보다 그 비정하고 비인간적인 점에 콱 기가 질린다.

역시 그 노인은 대단한 의지의 사나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