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밤 8시 당진제철소.

공장 전체가 고요했다.

불이 켜진 곳은 사무실뿐.

작업현장은 모두 불이 껴져 있다.

전에는 밤에도 공장가동 소리가 웅장하게 들리고 굴뚝의 연기가 하늘로
치솟던 곳.

1분 간격으로 철근제품을 실어나르던 트레일러의 행렬도 종적을 감췄다.

고철운송업자들이 정문에 트레일러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철야농성을 하고
있었다.

"잠못자며 운반한 철근운임 보상하라" "한보믿고 운반하다 연쇄 부도난다"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랭카드가 어지러이 트레일러에 걸려 있다.

공장 여기저기에는 운송업자들의 수송거부로 철근과 핫코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구내식당앞 게시판에는 저녁식사를 마친 직원들이 몰려들어 각종 공고와
신문복사판을 읽으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야간작업을 전면중단한 셋째날이다.

주간생산체제로 생산규모를 축소한 것.

또 이날 오후부터 소형봉강공장의 가동이 중단됐다.

가동되는 것은 핫코일을 생산하는 열연공장 1기뿐.

전체 가동률이 30%로 떨어졌다.

제철소의 설비보호차원에서 최소한의 가동만 하는 상황이다.

불씨를 꺼지지 않게 하려는 것.

일단 가동이 중지되면 냉각배관이얼거나 내화벽돌이 마모돼 재가동을
하는데 6개월이상 소요되는등 큰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당진제철소측이 생산규모를 줄인 것은 고철원료 부족이 원인.

현재 남아 있는 고철원료는 7천t으로 정상가동을 할 경우 하루 고철 소요량
7천5백t에도 미치지 못한다.

원료를 최대한 아껴야 하는 고육지책이다.

당진제철소 전용부두에는 5만8천t의 고철원료가 적재돼 있으나 활용할
수가 없다.

이곳이 보세구역으로 5억8천여만원의 관세를 내야 하나 그럴 형편이
못되기 때문이다.

"원자재인 고철비축분이 현재 7천t밖에 남지 않아 아껴 써도 이달말이며
바닥이 나 특별한 대책이 없는한 공장가동이 어렵습니다. LP가스도 29일
사용분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추가공급되지 않을 경우 조업중단을 할 위기에
있습니다. 또 한전측은 밀린 전기료 1백31억원을 납부하라며 전기공급을
중단하려 합니다"

박인찬 생산관리부장의 공장상황 설명이다.

그는 이어 "구내식당의 쌀과 부식공급이 중단될 위기였으나 정부의 도움
으로 해결돼 그나마 다행스럽다"며 "우선 고철과 연료를 공급해 주는등
회사부터 살리는데 총력을 기울여 달라"고 말했다.

현재 90%의 공정을 보이고 있는 제2연연및 냉연공장 건설도 공사가 사실상
중단된 상태.

현대 한라중공업등 기계설비업체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절반 이상의 중소업체들이 현장에서 철수해 버렸다.

일용직 노무자 7천5백여명중 4천여명이 이미 공사판을 떠났다.

한보측이 지어준 1백여개의 노무자용 숙소는지난 25일부터 난방마저 끊겼다.

당진제철소 종업원들이 겪는 어려움도 마찬가지.

지난 연말 성과급과 이달 임금을 받지 못했다.

사원아파트에도 전기 난방 수돗물공급등이 제대로 되지 않아 직원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출근버스도 연료부족으로 운행이 언제 중단될지 모르는 처지이다.

그래도 2천8백여명에 달하는 제철소 직원들은 하루 3교대로 근무를 하고
있다.

당진제철소의 부도여파는 지역경제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진제철소의 충남지역 협력업체는 줄잡아 2백여개.

이중 당진지역 협력업체는 1백40개 정도이다.

이들 업체에 지급되는 대급은 한달에 1백억원 정도.

이런 엄청난 돈이 일시에 끊어져 버린 것.

당진군의 한 전자회사측은 "자재비 3억원을 받지 못해 종업원들의 임금을
주지 못할뿐만 아니라 이달말까지 결제가 나지 않으면 부도가 날 형편"
이라고 말했다.

당진제철소 입주로 호황을 누리던 인근의 식당 노래방술집 여관등도
손님의 발길이 뚝 끊겼다.

10시 이전에 문을 닫는 업소가 태반이었다.

한 택시기사는 "당진읍에서 제철소까지 하루에 10여차례 왕복운행을 해
왔었는데 지금은 한두번 운행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29일 아침.

고철운송업체들의 5일째 시위를 벌이고 있다.

당진 인천지역 17개운송사업자 1백여명의 정문과 후문을 막고 밀린 운송
요금을 달라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1백억원에 달하는 운송대금을 한보가 아닌 한보철강판매(주)로부터
어음을 받은데다 이중 60억원은 오는 2월18일 만기가 돌아와 연쇄부도를
맞게 됐다"고 하소연했다.

이들은 "정부에서 협력업체에 대해 지원한다고 발표했는데 은행에서는
지침이 안내려 왔다는 말만 되풀이 할뿐"이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어둠에 휩싸였던 당진제철소에 이날 낭보가 찾아들었다.

당진제철소 관계자는 "통상산업부가 관세를 못내 하역을 하지 못하고 있는
5만t의 고철 가운데 3만t에 대해 관세를 유예하고 유공과 한전에는 밀린
가스사용료와 전기요금에 관계없이 가스와 전기를 공급하도록 하겠다는
통보를 해왔다"고 밝혔다.

직원들이 전날 가동을 중단했던 제철소 봉강공장과 열연공장 2기의 가동
준비를 서둘렀다.

정상가동을 위한 준비에 다시 부산스러워졌다.

<당진=이계주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