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서부 로키산맥 기슭 캘거리 시에 위치한 트라이웨스트 트레이딩사.

한국산 타이어를 수입 판매하는 이 회사의 오의균사장(51)은 독특한
경영방식과 판매전략으로 당당히 성공한 한국인 기업가다.

사업초기 현지인들의 거부감과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회사주식의 절반을
백인 변호사 2명에게 무상으로 내주고 그들을 사장으로 내세워야 했다.

이와함께 세일즈맨들에게는 실적에 따라 이익금을 배분하는 동업형식의
판매방식으로 사업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지난 70년 ROTC로 군복무를 마치고 한국타이어에 입사, 모회사인 효성물산
에서 수출실무를 익힌 그는 77년말 새로운 희망을 품고 캐나다로 이주했다.

한국에서의 직장 시절 그는 회사일이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해치우곤 하던
충성파 샐러리맨이었지만 "성공을 위해서는 부정과 결탁하지 않을 수 없는"
당시의 정치 사회적 배경보다는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에서 뜻을 펴보고
싶었던 때문이다.

대학시절(충남대 영문과)부터 꾸준히 익혀온 영어실력도 결단을 내리는데
도움이 됐다.

캐나다로 건너간 오사장은 몬트리올이나 밴쿠버 등 대도시로 가는 대신
인구 50만의 외진 도시 캘거리에 정착키로 마음을 정한다.

아름답고 쾌적한 경관에 매료된 것이다.

"요즘은 교통과 통신이 잘 발달돼 있어서 반드시 대도시에 가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민 다음해인 78년 신혼초 장만한 노량진 아파트를 팔아 마련한
1만5,000달러로 무역회사인 트라이웨스트사를 설립했다.

당시 1만5,000달러는 교포들이 주로 시작하는 식료품 가게나 음식점
운영에도 어려운 돈이었다.

그가 구상한 사업은 한국산 타이어의 수입판매.

한국에서 상품을 수출하던 입장에서 역으로 한국 상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 한국 이민자로서의 보람이라는 생각이었다.

그가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고 했을 때 친구나 동료들이 조국을 버린
"배신자"로 취급하는 데도 뜻을 굽히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이곳에서 더 큰 애국자가 되고 싶었던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으로부터 타이어 수입을 위해 은행을 방문, 신용장 개설을
문의한 결과 담보자산이나 보증금 없이는 신용장 개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현지 은행의 태도가 부당하다거나 인종차별이라고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적은 자본으로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이 특혜나 후한 대접을 바라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자세 아닙니까"

오사장은 백인사회와 업계에서 인정받고 자리잡기 위해 남다른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었다.

회사 설립시 주식 50%를 정계에 널리 알려진 변호사 2명에게 거저 나눠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주식 50%를 보유한 부사장으로 회사를 실질적으로 운영했다.

오사장은 백인 사장겸 변호사인 두 주주의 소개로 은행에서 필요한
신용장을 별 문제없이 개설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오사장은 상품수입과 고객확보 등 실제사업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막상 사업할 수 있는 준비가 되자 이제는 수입할 품목을 결정하는게
고민이었다.

시장 조사를 통해 캐나다 등 북미지역에서는 재생용 중고타이어가 현저히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재생기술이 낙후한데다 국내수요가 그리 많지 않아
재생용 중고타이어가 남아 돌고 있는 실정과는 대조적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경쟁이 심하고 자본이 많이 드는 일반 승용차나 트럭용
타이어를 취급하는 대신 재생용 중고타이어를 수입키로 결정했다.

그는 또 나름의 독특한 판매방식을 채택했다.

세일즈맨을 고용해 판매를 하되 월급제가 아닌 판매액과 수익률에 비례한
이익금 분배방식이 그것이다.

이런 수익금 분배 방식은 세일즈맨들이 자기 사업처럼 최대의 판매액과
이윤을 위해 뛰도록 만들었다.

또 판매는 하되 돈을 받지 못하면 분배금에서 비율대로 공제하도록
고용계약을 맺어 수금도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2년뒤 괄목할 만한 실적과 근면성으로 고객과 은행으로부터 신용을 얻은
그는 거래은행의 지원을 받아 백인 사장겸 변호사들에게 주었던 50%의
주식을 되사들였다.

경영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오사장은 취급 타이어의 종류를 다양화하고 판매망을
캐나다 전역과 미국까지 확장했다.

다행히 북미에 재생 공장을 가지고 있는 회사들은 일본이나 한국에서와
같이 중소 기업이 아니라 일반 새 타이어도 판매하는 대규모 딜러겸
판매회사들이다.

따라서 이미 재생용 중고타이어의 거래로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들을
통해 새 타이어의 수입 판매사업을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

오사장은 나아가 수익성이 높은 소형 특수 공업용 타이어를 수입 판매하여
연간 200여만달러의 실적을 올리게 됐다.

그 덕택에 트라이웨스트는 이제 특수타이어를 취급하는 전문 회사로
알려지게 됐다.

"사업은 끝없는 도전이고 출장은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거래선 확보를 위해 북미 전역을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대학시절 전국을 무전여행한 적이 있다.

또 지난 64년 제1회 국제 모터사이클 대회 우승 경력이 있을 정도로 그는
도전과 모험을 즐긴다.

이같은 그의 성격은 끈질긴 노력과 성실성으로 이어져 처음 만난 바이어들
조차 시험주문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설득하고 한번 확보한 거래선에는
최선의 관리를 다해왔다.

캐나다 이주 19년간 그에게는 크고 작은 어려움도 많았지만 일확천금을
노리겠다는 허황된 꿈을 꾼 적은 없다.

고객에게 항상 친절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불량품은 철저히 보상해주는
서비스 정신도 잊지 않았다.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성실한 기업가가 되고자 하는 그의 끊임없는 노력이
이제는 캐나다 땅에서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오사장은 자기 사업을 꾸리기에도 바쁘지만 주위 이웃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는 자기일처럼 도움을 주곤 했다.

새로 이민온 교포 부부가 구멍가게라도 해보려고 고생끝에 모은 돈을
사업 경험부족으로 하루아침에 모두 날려버리게 됐을 때 무상으로 변호사를
대주고 돈을 되찾게 해준 일도 있다.

교포들이 무역이나 사업을 시작하고자 도움을 청할 때 은행계좌 개설,
운수회사 소개는 물론 자기 사무실의 책상과 텔렉스 전화 팩스등 집기들을
같이 쓰게 해 주기도 했다.

그의 신용과 명성이 알려지면서 처음에는 취급을 꺼리던 캐나다와 미국의
제조업자들이 서로 제품취급을 부탁하게 됐다.

이와 함께 일본과 대만 제조업자들도 한국 못지 않은 좋은 가격으로 최선의
협조를 제공하고 있다.

오사장은 이제 자기가 원하던 모든 종류의 타이어를 취급하게 됐고 현지
백인 기업과도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 기업규모를 갖추게 됐다.

지난 86년에는 밴쿠버에 지점을 설치했고 캘거리 본사도 2.5에이커 부지에
3만2,000 평방피트의 사무실과 창고를 구입, 8년간의 셋방살이를 면하게
됐다.

종업원도 15명으로 늘었으며 거래선도 400여개사에 달해 매출액도 1,000만
달러를 내다보게 됐다.

그는 지난 92년 김철수 당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사장으로부터 캘거리
지역 KOTRA 명예대표로 임명받았다.

이에 따라 캘거리 지역에서 현지인들에게 한국의 상품을 소개하고 홍보하는
봉사활동도 아울러 맡고 있다.

오사장은 처음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이주했지만 지금은 현지에서
1남1녀를 더 얻어 4남매로 유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현재에 만족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남들은 성공했다고 평가하지만 아직 내꿈이 다 성취된 것은 아닙니다"

성공은 지속적인 노력과 긍정적인 마음 자세를 유지할 때 다가오는
것이라고 오사장은 강조한다.

그리고 캐나다 이민생활과 사업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가족들의 깊은 신앙심 때문에 가능했다고 덧붙인다.

< 김주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