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게 무슨 소리들인가 하고 보채가 적취정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워 기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가운과 소홍 사이에 연정이 싹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견습시녀 주제에 가씨가문의 도령을 넘보다니.

보채는 속으로 소홍을 아니꼽게 여기면서도 소홍이 보옥에 대하여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솔직히 말해 봐요.

그 손수건 언니가 잃어버렸다는 손수건 아니죠?"

추아가 다시 다그치며 묻자 소홍이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더니 결국
실토하고 말았다.

"그래, 네 말대로야. 가운 도련님이 그런 식으로 나에게 선물을 주는
줄 알고 받았던 거지.

추아 너한테는 거짓말을 하게 되어 미안해.

근데 가운 도련님이 내 손수건이라고 돌려주는 것을 내 손수건이
아니오 하고 다시 되돌려준다면 도련님에게 실례를 범하는 것이 되잖니.

도련님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고 해서 받았던 거야.

이런 이야기 아무한테도 하면 안돼. 알았지?"

"그럼요.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하겠어요?

그리고 나한테 미안해 하실 필요없어요.

어찌되었든 난 사례까지 받았는걸요"

"가만 있자, 누가 바깥에서 엿들을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큰소리로
이야기했구나.

이렇게 창을 다 닫아두고 이야기하면 괜히 의심을 받을 테니까 창을
몇개라도 열어두고 우리 딴 이야기 하자"

소홍이 이렇게 말하며 종이창을 두어 개 열었다.

보채는 그들에게 들킬까 싶어 몸을 더욱 움츠리고 있다가 살금살금
화신제가 벌어지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소홍과 추아도 잠시 후에 적취정을 나왔다.

그런데 소산 근처에 이르렀을 때 희봉이 소산 꼬대기에 서서 소홍을
향해 손짓을 하였다.

소홍이 무슨일인가 하고 달려가니 희봉이 심부름을 하나 해줄수
있느냐고 물었다.

"어떤 심부름인지 말씀만 하세요.

제가 심부름을 잘못하여 일을 그리칠까 염려가 되네요"

희봉이 보니 소홍이 대답하는 폼이 여간 말끔하지가 않았다.

저런 시녀를 밑에 둔다면 훨씬 일하기가 편할 텐데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넌 누구 밑에서 일하는 아이더라?"

"보옥 도련님 밑에서 일해요"

"그러고 보니 얼굴을 본 것도 같구나.

보옥 도령이 너를 찾으면 내가 말을 잘 할테니 너는 우리 집으로 가서
평아더러 장재의 아내가 오거든 바깥방 책상 위에 있는 큰 접시 밀 궤짝
속에서 은전 백육십 냥을 꺼내어 주라고 하여라.

그건 사주 뜨는 사람에게 줄 삯이거든. 그리고 올 때 안바 침대머리에
작은 돈 주머니가 하나 있으니 그걸 가지로 오러나"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