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초 몹시 힘들어 하며 교수생활을 하던 필자에게 지금은 돌아가신
은사님께서 "실언을 하지말라"고 일러주셨다.

실언이나 하며 다니는 주책없는 존재로 선생님께 비쳤나 싶은 자격지심에
얼굴을 붉히고 있는데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사람들이 듣지 않고 받아
들이지 않으면 말이 실종되고 만다.

실종되어 버리고마는 말이 바로 실언이다"라고 설명하셨다.

어느덧 세월이 한참 흘러 이젠 실언이 안되려나 하는 막연한 기대로
어줍잖은 글도 쓰고 내 학문과 직접 연관되는 주제에 한한다는 조건으로
TV에도 가끔 얼굴을 비쳤다.

그러던 어느날 내 글에 어휘만 바뀐 동의어가 반복하여 나타나고 있는
사실을 깨닫고 아연해있는데,대학시절부터의 외우가 지나가는 말투로
"만사엔 여유가 있어야 하겠더라"고 한마디 던지는게 아닌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나에게 하는 충고인지,아니면 세상사의 일반론인지
모르겠지만 허를 찔린듯 뜨끔하였다.

짧은 말일수록 함축하고 있는 뜻이 깊어서 듣는 사람의 마음상태에 따라
여러가지 색깔과 의미를 담아내게 마련이다.

지식도 사유도 샘물과 같아서 그것이 가득차 흘러 넘칠때 조금씩 떠서
써야 쓰는 이도 항상 가득찬 느낌속에 여유있게 나눌수 있고,읽고 듣는
이도 편안하게 받아들일수 있을터인데,미처 고일새도 없이 계속 퍼 쓰니
마지막엔 찌꺼기까지 마구 퍼 올려 자신의 고갈은 물론 남에게도 말과
글의 공해를 퍼뜨리게 되는 것이리라.

그래서 전통시대 지성들은 만권의 책을 읽어 가슴에 가득찬 "서권기"가
흘러 넘쳐 글이 되고 글씨나 그림이 되는 것이라고 했던가.

손끝에서 부리는 잔재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였다.

아울러 지식은 지식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고 "착실체인"하여 온전히
자기화했을때 실천으로 나타나 의미가 살아난다고 생각하였다.

18세기 조선문화 융성기의 학자군주 정조(1752~1800)는 "학문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날마다 쓰는 것으로 학문공부 아닌 것이 없다" 또는 "학문의 길은
날마다 쓰는 사물위에 있으니 그 지당처를 강구하여 나아갈 뿐이다"
하였다.

학행을 통한 산 지식만이 진정한 지식이요,현실적용이 되는 학문만이
진정한 학문이라는 인식이 전통적 이해체계였다.

앎과 행동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지행합일적 전통이 언제부터인지
실종되어 우리는 지식을 위한 지식쌓기에 여념이 없고 또 그 지식을
퍼뜨리기에 골몰하고 있다.

더구나 그 지식이 우리의 현실과는 무관하고 접목시킬수도 없을만큼
이질적이고 쓸모없는 것이라면 하루빨리 선별작업을 통하여 걸러내
시간과 노력의 낭비를 막고 확대재생산을 더이상 계속해서는 안되겠다는
인식이 확산되어야겠다.

그러한 정지작업이 이루어진 후에야 이 시대에 꼭 필요한 학문,다시
말하면 이 시대의 실학이 무엇인지 찾아낼수 있을 것이고 그 실학이
토대가 될때 이 시대는 제 방향을 잡을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실학은 무엇이어야 할까.

19세기 과학기술문명을 앞세운 서구 열강이 세계를 제패하자 응용과학
내지 기술학이 실학으로 부상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인문학에 편중되었던 전통시대 학적체계에 대한 반성도 한몫 거들었다.

이제 그 과학기술문명의 한계상황에 이른 이 시대에는 그것을 운용하는
인간의 도덕성이 요구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 시대의 실학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창출해내는 학문이 되는 것이
당위이다.

그 참된 실학이 정립되어 정신적 지주로 기능할때 더이상 조바심치며
실언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여유있는 마음밭을 가꾸는 사람들로 우리
주변은 가득차 더이상 상대의 공격에 대응할 자세로 신경을 곤두세워
투쟁하지 않아도 될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