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수질오염을 줄이기위해 하수도시설기준을 개정,93년부터 적용할 방침이다. 20일 건설부에 따르면 도시지역 수질오염의 주요원인인 빗물을 처리한후 방류하도록 시설기준을 보강하고 규소와 인을 제거하기위한 고도처리시설기준도 도입키로했다. 정부는 또 분뇨나 정화조 수거물을 하수처리장에서 통합처리하고 처리장에서 발생하는 슬러지를 소각할수있는 슬러지소각시설기준을 새로 마련할 계획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서 주목 받고 있는 한인 수제맥주 브랜드가 있습니다. 바로 ‘도깨비어’입니다. 미국은 수제맥주의 천국입니다. 그중에서도 캘리포니아는 경쟁이 가장 치열한 시장 중 한 곳입니다. 이는 뒤집어 보면 캘리포니아에서 인정받는다면 미국 전역에서 통하는 맥주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캘리포니아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담은 수제맥주 브랜드가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수많은 맥주 브랜드 중에서 도깨비어는 어떤 점을 내세워 성장하고 있을까요.‘창업의 요람’인 실리콘밸리에서 테크기업만 있는 게 아닙니다. ‘컬처 스타트업’도 있습니다. 도깨비어는 ‘K컬처 스타트업’의 앞단에 서 있는 기업입니다. 도깨비어 본사가 있는 오클랜드에서 이영원 대표를 만나 직접 맥주이야기와 창업 스토리를 들어봤습니다.사진 : 최진석 특파원Q. 간단한 자기소개를 해주세요.A. 미국에서 한국의 맛과 멋을 담은 수제 맥주 도깨비어를 운영하는 이영원 대표입니다. 올해로 주류 경력 16년 차입니다. 도깨비어는 미국에서 창업한 지 4년 정도 됐습니다.Q. 도깨비어 창업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A. 2008년에 한국에서 주류 관련 일을 시작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스파클링 와인 버니니를 한국에 론칭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와 함께 샴페인 아르망 디 브이냑과 페트론 등 주류를 한국에 수입 및 유통했습니다. 이후 가로수길과 청담동에 ‘매그넘 더 보틀샵’, ‘매그넘 더 테이스팅 룸’ 매장을 운영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7년 전에 미국으로 와 한국의 수제맥주 회사인 ‘더 부스 브루어리’의 미국 시장 진
“예술을 추구하는 영혼과 스포츠의 극한을 넘어서려는 근육이 모여 완벽한 사람을 만들어요. 예술가의 공연과 시민의 참여를 통해 스포츠의 가치를 얘기하려는 게 파리 문화 올림피아드죠.”두 달 앞으로 다가온 ‘2024 파리 올림픽’은 프랑스가 1924년 이후 정확히 100년 만에 파리에서 여는 올림픽 대회다. “다시는 볼 수 없는 대회가 될 것”이라는 토니 에스탕게 올림픽 조직위원장의 각오처럼 2일(현지 시각) 찾은 파리는 콩코르드 광장에 경기장이 설치되는 등 전 세계인을 맞을 준비로 여념 없었다. 흥미로운 점은 올림픽·패럴림픽을 앞두고 파리 전역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예술 이벤트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 올림픽 정신을 예술로 즐기는 시도인 ‘파리 문화 올림피아드’ 행사들이다. 쿠베르탱의 나라, 스포츠와 예술 아우르는 이유‘파리 문화 올림피아드’는 조직위원회가 올림픽 성공을 위한 핵심 콘텐츠로 제시한 대규모 이벤트다. 이날 파리 코리아센터에서 만난 도미닉 에르비유 올림피아드 총괄 감독은 파리뿐 아니라 프랑스 전체가 나서 올림픽과 연계한 예술 전시·공연을 선보이는 이유에 대해 “올림픽의 긴 역사는 문화와 함께 해왔다는 걸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그는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고대 그리스 올림픽을 현대적 문화행사로 만들자고 한 게 올림픽”이라며 “예술과 스포츠 사이에서 소통이 이뤄진다는 정신을 기반으로 연대, 통합 같은 올림픽 철학이 하나의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도록 행사를 마련했다”고 덧붙였다. 근대 올림픽 창시자인 쿠베르탱의 나라인 만큼, 스포츠와 예술을 아우르던 초기 근
“퇴사하고 시작하려던 사업이 그야말로 폭삭 망했습니다. 눈앞이 깜깜했을 때, 가로·세로 15㎝ 색종이를 우연히 만나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기회는 운명처럼 오니,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라는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종이접기 교육의 선구자인 김영만 종이문화재단 평생교육원장은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2000년대 초 출생자)에게 ‘영원한 종이접기 아저씨’다. 첫 에세이집 <코딱지 대장 김영만>을 낸 그는 최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구를 빌려 쓰는 80년 동안 도전하고 용기를 내라”고 했다.▶처음부터 ‘코딱지들의 영원한 종이접기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직장인 시절도 있었네요.미술대학 산업디자인과(당시는 도안과)를 졸업하고 대기업 광고선전실에 입사했어요. 즐겁게 일했고, 승진도 빨랐어요. 그런데 당시 직장인으로서 디자이너의 수명은 다른 직군보다 짧았어요.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디자이너가 부장까지 진급하기 어려웠어요. 언제 ‘잘릴지’ 모르니까, 그때 고민을 많이 하다가 광고 기획사를 창업하기로 하고 퇴사했어요. ▶그래도 퇴사 결정이 쉽진 않았을 텐데요.요즘과 달리 그때는 취업이 잘 됐어요. 창업했다 안 풀리면 다시 취업해도 되니까. 또 그때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계획대로 창업이 풀리지 않았다고.정신을 못 차릴 만큼 폭삭 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