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민주주의는 꽤나 오래도록 멸시당했다
민주주의는 매력적인 단어다. 지고지순의 경지에 올랐다. 심지어 무소불위다. 정치인들이 상대 후보를 쓰러뜨리기 위해 흔히 쓰는 수사가 ‘민주주의의 적’ 아니던가. 지금은 아름다운 백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민주주의는 불과 400년 전만 해도 미운 오리 새끼였다.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는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에 이르는 사상가들이 민주주의를 배척해온 과정을 추적한다. 책을 쓴 김민철 성균관대 교수는 ‘민주주의 혐오의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책마을] 민주주의는 꽤나 오래도록 멸시당했다
저자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개념은 ‘인민이 통치하는 정부’다. 정부를 ‘통치’하는 것과 국가의 주인이 되는 ‘주권’의 개념은 다르다. 저자는 이를 주식과 펀드의 차이에 비유한다. 주식은 개인이 투자액과 투자처, 매수·매도 시기를 결정한다. 민주주의에서 주권에 가까운 개념이다. 펀드에 맡기는 경우는 다르다. 돈의 주인은 여전히 개인이지만 자금을 운용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펀드매니저의 손에 맡겨진다. 통치와 비슷하다.

18세기 미국과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개혁가들은 인민이 나라의 주인이란 국민주권 사상을 반영하면서도 인민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끔 고심했다. 엘리트들이 인민의 주권을 관리하는 일종의 펀드매니저가 되는 셈이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가 오랫동안 경멸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책의 1부는 엘리트 집단이 민중의 의지와 목소리를 두려워한 과정을 설명한다. 민중은 감정에 휘둘리고 쉽게 선동당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민주정은 법이 지배하는 형태로, 법 대신 민중의 결의가 최고 권력을 갖는 것은 진정한 민주정이 아니라고 했다. 르네상스 시기 사상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민중에 대한 불신은 사회계약론을 주장한 학자들로 이어졌다. 저자는 “루소와 볼테르를 포함한 계몽주의자 대부분은 민주주의를 배격했다”고 말한다.

2부는 민주주의가 주류 정치 무대에 올라온 과정을 살펴본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인민의 주권과 통치 사이의 장벽이 완화됐다. 그 중심엔 콩도르세가 있었다. 그는 “인민이 원래 흉포한 것이 아니라 흉포할 만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지와 가난, 가혹한 형벌과 특권계급의 오만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자유로운 언론과 공교육 확대로 이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고 봤다.

어느덧 민주주의는 ‘당연히 좋은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지만, 의미가 변질됐다.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개념이 태동하면서다. 자유민주주의는 20세기 냉전 시기 체제 경쟁을 거치며 민주주의와 동일시됐다. 저자는 자유민주주의의 무게추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 쪽에 있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 무늬를 띤 투표제 위에 수립된 자유주의 정부’란 이유에서다.

책은 현대 민주주의의 문제를 짚는다. 저자는 “사실상 엘리트 통치집단과 구분되지 않는 기업인 언론인 법조인 의료인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국가는 엄밀히 말해 민주정이 아니다”고 꼬집는다. 민중의 실질적인 통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대의제를 활용한 투표 귀족정에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저자는 인민의 잠재력을 강조하며 책을 갈무리한다. 인민은 자주 속는다. 하지만 부유하거나 교육을 많이 받은 전문가라도 그릇된 판단을 할 가능성이 있다. 책은 잦은 실수를 통해 ‘큰 그림’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인민의 미덕으로부터 민주주의의 진가가 발휘될 수 있다고 제언한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