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보다 13년 먼저 외세 맞닥뜨린 일본, 무엇이 달랐나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일본, 1854년 일·미 통상조약으로 개항
이데올로기 차이 바탕으로 서양문물 적극 수용

한편 일본은 1853년에 미국이 파견한 흑선(군함)의 포함외교에 경악했고, 1854년에는 오키나와와 유·미(琉·美) 수호조약을 맺고 온 미국과 ‘일·미 통상조약’을 맺고 개항을 선택했다. 의아하다. 불과 13년 앞서 선진 외세를 경험한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켰고, 1910년에는 식민지로 만들어 아직도 분단의 비극이라는 멍에를 못 풀고 있다.
![조선보다 13년 먼저 외세 맞닥뜨린 일본, 무엇이 달랐나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https://img.hankyung.com/photo/202103/01.23568241.1.jpg)
일본은 몇 가지 점에서 조선과 분명히 달랐다.
첫째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종류와 성격이다. 전통신앙을 계승했고, 18세기 후반에는 국학을 발전시켜 신도사상과 천황제의 중요성을 자각했다. 효와 인, 근왕정신(충)을 중요시한 조선의 성리학과는 달리 천황과 주군에 충성하고, 의리와 명예를 준거가치로 삼았다. 불교는 ‘선(禪)’을 매개로 무사도와 결합했고, 백성들의 실생활과 밀접해져 주도적인 사회사상 역할을 했다. 비록 16세기 후반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일부 지역에 끼친 천주교의 영향도 경시할 수 없다.
둘째, 외국, 특히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1582년에 현재 오이타현 지역에서는 4명의 소년 사절단을 유럽에 파견했고, 1613년에 센다이번이 파견한 유럽 사절단은 범선으로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와 쿠바를 거친 다음에 대서양을 건너 에스파니아에 도착했다. 그들은 로마까지 가면서 문물을 견학하고, 통상활동을 했다. 17세기 전반에 바쿠후(幕府·막부)는 수많은 주인선(무역선)을 동남 아시아까지 파견했고, 해외에 일본마을(町)을 건설했으며 태국에서는 하급 무사들이 아유타 왕국에서 발생한 쿠데타에 참여했다.
셋째, 난학(네덜란드)을 활용해 서양의 과학과 기술·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지도 제작술·조선술·항해술·무기·천문·의학·농법 등의 실용적인 지식과 기술을 수용하고, 학교를 세워 적극적으로 나라 발전에 활용했다. 섬나라 일본인들은 인식이 세계로 확장됐고, 신사상인 인본주의와 근대화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바쿠후 말기에 서양의 압박을 받자 애국심을 발휘하고, 정치와 사회개혁을 신속하게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훈련받은 것이다.

다섯째, 경제가 발전하여 자본주의 체제와 산업혁명의 결과를 수용할 토대가 마련됐다. 농법과 농기구 등의 개량으로 농업 생산력이 높아졌고, 어업과 공업 등의 산업이 발달했다. 기술력의 발전으로 도로망·수운·해운이 발달해 전국적인 규모의 유통권을 만들었고, 상업이 발달했다. 각 번들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운영 재정의 확충을 위해서 상업을 확장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대도시가 발달해 1721년에 에도의 인구는 100만 명을 웃돌았고, 오사카나 교토도 40만 명을 상회했다. 자연스럽게 유연한 사고와 능력을 갖춘 대상인들을 주축으로 전통질서를 비판하면서 신사상과 신문화, 신체제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결국 일본의 성공적인 개항은 실학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이며, 실력을 갖춘 사회 흐름이 형성된 덕분이다.
의아하다. 조선 통신사들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파견됐는데, 한 번에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 참가했다. 그들은 곳곳에서 일본의 변신과 발전을 보면서 감탄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오랑캐라는 편견과 패전국이었다는 반감 때문인지 성리학의 우월감과 개인의 문학적 능력을 자랑하는데 공력을 기울였다. 물론 조엄 등 일부는 꼼꼼히 상황을 기록하고, 귀국 후에는 문물을 도입할 것을 역설했지만 ‘북학’을 표방한 연행사 등과 달리 ‘남학’을 자처하지 못한 채로 조선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19세기 중반 무렵이 되면서 서양세력들은 동아시아 세계를 유럽의 무역망,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시키려고 시도했다. 서양의 우세한 무력, 불평등한 조약, 질 높은 상품 등과 대응해서 방어와 역전에 성공한 나라는 일본 뿐이었다.

그런데도 바쿠후는 1860년에 견미 사절단, 1862년에 견구(유럽) 사절단, 1863년에 견불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서양 문물을 배우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1863년 8월에는 사쓰마번이 영국과 3일 전쟁을 벌였고, 1864년에는 세또 내해의 입구를 방어하는 조슈번이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연합 함대와 전쟁을 벌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바쿠후는 계속해서 1866년에 유학생을 영국으로 파견했고, 견러 사절단도 파견했다. 물론 유력한 번의 다이묘들도 바쿠후 몰래 국비 유학생을 파견하면서 새 시대에 대비했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이 전개될 때 조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악랄한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해 나라는 붕괴 직전이었고, 1860년에 신정권을 수립한 대원군은 개혁정치도 했지만,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1865년부터 빈약한 국고마저 거덜 낼 경복궁을 중수하는 사업에 돌입했다. 천주교가 가진 문명사적인 의미와 정치적인 역할을 모른 채 박해했으며, 1866년에 병인양요, 1871년에 신미양요를 겪은 후에도 승전이라고 백성들을 기만하면서 자기 권력 강화에 이용했다.
가정해 본다. 만약 조선의 지식인들이 현실과 백성들을 생각하고, 개방을 개혁과 발전의 호기로 판단하면서 적극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했다면 일본의 식민지가 안 됐을까?
그때와 유사한 상황이 반복될지 모른다는 역사학자의 기우 속에서 미래를 위한 전략으로 조선의 개항과 붕괴과정을 솔직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
기사 스크랩
-
공유
-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