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 K1에 전시된 최욱경의 1960년대 작 ‘무제’.  국제갤러리 제공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 K1에 전시된 최욱경의 1960년대 작 ‘무제’. 국제갤러리 제공
작고 깡마른 여성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붓질을 한다. 맨발에 짧은 옷차림으로 키보다 훨씬 높은 캔버스를 상대하는 이 여성은 추상화가 최욱경(1940~1985)이다. 작업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소개되고 있는 최욱경 영상 자료는 한 번 작업을 시작하면 하루고 이틀이고 캔버스 앞을 떠나지 않았다는 그의 창작열을 짐작하게 한다.

서울의 유복한 집에서 태어난 최욱경은 일찍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여 김기창 김창렬 문학진 정창섭 등 당대의 유명 화가들에게 그림을 배웠다. 1963년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뒤 미국 크랜브룩 미술대와 브루클린미술관 미술학교에서 유학했고, 프랭클린 피어슨대 조교수로 일했다.

독신이었던 최욱경은 1978년 영구 귀국한 뒤 영남대와 덕성여대 교수로 일하며 창작활동에 전념했다. 술과 담배를 즐겼던 탓일까. 한창 왕성하게 작업할 나이에 뜻밖의 심장마비로 요절했다. “며칠 후 미국에서 ‘내 새끼들’이 온다”며 기다렸던 ‘새끼들’을 보지 못한 채였다. 그는 평소 자신의 작품을 ‘내 새끼’라고 부르며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국제갤러리가 2년간의 리모델링 공사 끝에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1관(K1)의 재개관을 기념한 첫 전시로 최욱경 개인전 ‘Wook-kyung Choi’를 열고 있다. 강렬한 색채, 대담한 선과 거친 붓질로 내면의 열정을 분출했던 최욱경이 1960년대와 1970년대 중반까지 미국에서 그린 컬러와 흑백 작품 40여 점을 걸었다. 유화, 아크릴물감뿐만 아니라 목탄, 콩테, 오일 파스텔, 잉크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작품으로, 대부분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다. 강렬한 원색을 사용한 추상화와 콜라주부터 먹을 사용해 동양화 느낌이 묻어나는 잉크 드로잉까지 폭넓은 작품 세계를 살필 수 있는 자리다.

K1의 전시 공간은 두 개다. 도로 쪽으로 큰 창을 내 바깥 풍경을 실내로 끌어들인 전시실에서는 조형적으로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던 최욱경의 초기 컬러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최욱경은 특정 사조를 표방하거나 고집하는 대신 형태와 공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주제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번에 공개된 그의 초기작들은 미국 추상표현주의 작가인 윌렘 데 쿠닝의 자유분방한 선과 로버트 마더웰의 추상적이면서도 명상적인 화풍을 떠올리게 한다.

두 번째 전시실에서는 잉크, 목탄, 콩테를 이용한 드로잉과 판화 등 흑백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잉크 드로잉은 검은 선과 흰 배경이 똑같이 추상적인 의미를 지닌 추상표현주의 작가 프란츠 클라인의 작업을 연상시킨다. 글자뿐만 아니라 여백의 미가 중요한 동양의 서예와도 일맥상통하는 느낌이다.

최욱경은 서양화 작가로는 이례적으로 먹을 활용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지가 아니라 인화지처럼 광택이 있는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려 기계를 이용한 인쇄와 손으로 그린 드로잉이라는 이질적 매체를 혼용했다. 다양한 매체를 실험했던 최욱경은 미국 추상표현주의 작품들과 달리 현실에 기반한 추상표현이라는 독자적인 조형양식을 만들어냈다.

“젊은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와 미국과 한국 어디에서도 편하게 느낄 수 없는 채 두 세계 사이에서 성장했다.” 최욱경과 가까운 친구였던 화가 마이클 애커스는 이렇게 회상했다. 하지만 최욱경이 이룬 조형적 성취는 그가 경계인이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국제적인 동시에 한국적이었던 최욱경의 작품은 다음달 31일까지 볼 수 있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