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 사피 바칼의 혁신 지침서 '룬샷'

세상을 바꾸는 혁신, 예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제품은 고정관념의 완고한 벽을 뛰어넘기 어렵다.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가 '괴짜'로 따돌림받다가 뜻을 펴보지 못한 채 흔적 없이 사라지거나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창의적 발상이 '허튼수작'이나 '공상'으로 치부돼 사산하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혁신의 싹을 알아보고 이를 잘 키워 풍성히 꽃피우고 열매 맺게 하는 것은 조직 문화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를 흔히 한다.

과연 그럴까.

미국 스탠퍼드대 물리학 박사이고 경영 컨설턴트와 기업 최고경영자(CEO)로도 일했던 사피 바칼은 위대한 아이디어와 제품은 원래 하나같이 '룬샷(LOONSHOT)'이었다고 지적한다.

풍자를 섞어 정의하면 룬샷이란 '주창자를 나사 빠진 사람으로 취급하며 다들 무시하고 홀대하는 프로젝트'이다.

저자는 룬샷을 성공으로 이끄는 주된 인자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조직 문화보다는 '구조'를 들면서 물리학의 '상전이(phase transition)' 개념을 끌어들여 그 근거를 설명한다.

상전이는 조건의 변화에 따라 같은 물질의 상(相)이 바뀌는 현상을 의미한다.

온도에 따라 물이 얼음이 되기도 하고 얼음이 물이 되기도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성공을 이끄는 것은 조직문화가 아니라 구조"
물을 망치로 깨트릴 방법은 없다.

그러나 상전이를 통해 물이 얼음이 되면 그것이 가능해진다.

책에서는 상전이를 통해 천지개벽의 대성공을 거둔 많은 사례가 소개된다.

연합군의 제2차 대전 승리의 숨은 공신 버니바 부시가 대표적이다.

MIT 부총장이었던 부시는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194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다가올 전쟁에서 이기는 데 꼭 필요한 기술 면에서 독일에 한참 뒤처져 있다"면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설득해 대통령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는다.

결국 과학연구개발국(OSDR)이라는 새 조직의 책임자가 된 부시는 대학과 민간 연구소의 과학자·엔지니어·발명가들을 찾아내 이들이 얼마든지 '괴상한 것들'을 탐구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부시의 전폭적 지원으로 실용화에 성공한 군사용 레이더는 연합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던 독일 공군기의 영국 본토 폭격과 잠수함의 영·미 수송선 격침 작전을 무력화해 독일의 기세를 꺾고 전황을 뒤집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러나 레이더는 전혀 새로운 기술이 아니었다.

1922년 오하이오주 농촌 출신의 서른한 살 청년 리오 영과 무선통신 과학자인 마흔두 살의 호이트 테일러는 전파를 이용해 해상에서 배들이 더 안정적으로 통신할 수 있는 실험을 하던 중 전파 송신기와 수신기 사이에 물체가 지나가면 전파신호가 세진 뒤 완전히 사라졌다가 다시 세지는 현상을 발견한다.

레이더의 기본 원리를 파악한 영과 테일러는 이 원리를 군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봤으나 이들을 만난 해군 장성들은 "허무맹랑한 아이디어"라면서 일축했다.

늦었지만 다행히도 20년이 지나 부시라는 촉진자를 만나 레이더는 전장에 배치될 수 있었다.

"성공을 이끄는 것은 조직문화가 아니라 구조"
부시의 역할은 전쟁 기술의 개발로 끝나지 않았다.

부시의 역량을 알아본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쟁 종료가 가시권에 들어온 1944년 11월 전후 국가 발전의 관건이 될 과학기술 정책의 밑그림을 그려 달라는 요청을 했고 그는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 이듬해 루스벨트 후임자인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과학: 그 끝없는 전선'이라는 문건으로 정리해 보고했다.

보고서의 요지는 '기술 발전의 페이스 메이커'인 기초과학 연구자금을 자선사업이나 민간 기업에만 의존할 수는 없으므로 새로운 국가적 연구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룬샷'을 국가가 체계적으로 지원하자는 이야기다.

GPS와 개인용 컴퓨터, 바이오산업, 인터넷, 심박조율기, 인공심장, MRI, 소아 백혈병에 쓰이는 화학요법, 심지어 구글 검색 알고리즘의 원형에 이르기까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한 기술들은 모두 부시의 보고서에 자극받아 만들어진 시스템을 통해 탄생한 작품들이다.

스마트폰 시대의 도래를 예측하지 못해 몰락한 노키아는 반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세계 휴대전화 시장을 석권했던 노키아의 엔지니어 몇몇은 2004년 인터넷이 가능하고 커다란 컬러 터치스크린에 고해상도 카메라가 달린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전화기를 만들었다.

거기에다 '온라인 앱스토어'를 만들자는 제안까지 했다.

그러나 노키아의 지도부는 이들의 아이디어를 완전히 묵살했다.

그로부터 불과 3년 뒤 애플이 아이폰을 공개하고 휴대전화 시장에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 것은 모두가 아는 이야기다.

흥미로운 것은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노키아는 창의와 혁신을 이끄는 '기업문화의 모범'으로 칭송받는 기업이었다는 점이다.

유수의 잡지에 표지 모델로 나와 자사의 성공 요인이 기업문화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경영진은 그대로인데 노키아는 왜 내리막길을 걷게 된 것일까.

저자는 그 이유로 '프랜차이즈(franchise)' 개념을 든다.

룬샷으로 성공을 거둔 기업이라 해도 규모가 커지고 안정된 단계에 접어들면 계속 모험을 하기보다는 최초 제품이나 서비스의 후속작 또는 업데이트 버전, 즉 프랜차이즈에 주력하려고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새로운 룬샷을 들고나오는 또 다른 혁신기업에 밀릴 가능성이 커진다.

저자는 그러나 룬샷만이 경쟁하는 조직과 기업의 살길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효율성과 안정을 추구하는 일상적 조직 논리 역시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저자는 이를 예술가와 병사에 비유한다.

느슨한 목표와 명상하는 시간이 예술가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군대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는 해가 된다는 논리도 성립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양자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다.

저자는 자신의 논지를 상분리와 동적평형을 각각 축으로 하는 도표로 설명하기도 한다.

상분리와 동적평형 모두 강한 상태를 부시와 또 다른 룬샷의 촉진자인 시어도어 베일 AT&T CEO의 이름을 따 '부시-베일 균형'이라고 이름 지었다.

부시와 베일은 모두 조직을 상분리와 동적평형이 함께 약한 상태에서 함께 강한 상태로 곧장 이끄는 데 성공했다.

룬샷 그룹과 프랜차이즈 그룹이 잘 분리돼 있으면서 똑같이 강한 힘을 발휘하는 한편(상분리) 지속적으로 프로젝트와 아이디어를 양방향으로 교환하는 상태(동적평형)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창의성과 혁신을 심는다면서 두서없이 서두르면 '혼돈' 상태가 된다.

반면에 조직도에 박스 하나 더 그려 넣고 새로운 건물을 임차해 새 연구소 간판을 내거는 것에 만족한다면 '함정' 상태라고 한다.

저자는 특히 '신성한 리더'의 뜻에 따라 아이디어가 정지된 팀이나 기업이 빠진 함정을 '모세의 함정'이라고 부른다.

"성공을 이끄는 것은 조직문화가 아니라 구조"
다시 상전이로 돌아가자면 균형을 잡는 것은 망치로 깨트릴 수 있도록 욕조 속의 물을 얼리면서 동시에 얼지 않는 물도 남겨두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물의 온도를 정확히 0℃로 유지하면 얼음의 가장자리에 물이 찰랑거리는 상태가 된다.

저자는 이를 "균형을 유지해서 어느 한 상태가 다른 상태를 압도하지 않게 하려면 필요한 부분이 있다.

바로 룬샷을 도모하는 예술가와 프랜차이즈를 도모하는 병사가 똑같이 사랑받는다고 느껴야 한다는 것, 나약하고 모호한 소리처럼 들릴 수 있지만, 아주 현실적인 얘기이자 자주 간과되는 요소다"라는 말로 정리한다.

제품과 기업은 물론 국가의 성공 요인을 상전이와 복잡계, 제어변수와 같은 물리학 개념을 차용해 설명하지만, 술술 읽히는 흥미로운 역사적 사례들로 풀어나가 어렵거나 딱딱하다는 느낌이 안 든다.

지도자급 인사들이 국가나 기업 경영에 필요한 통찰력을 얻는 데도 유용할 수 있겠지만 단순히 재미로 읽기에도 손색 없다.

흐름출판. 이지연 옮김. 468쪽. 1만8천원.
"성공을 이끄는 것은 조직문화가 아니라 구조"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