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울림 50돌 기념 연극 '앙상블' 주연 예수정

지적장애 가진 35살 아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어머니 役
12월엔 '메리 제인'에 출연
오는 19일 개막하는 연극 ‘앙상블’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예수정.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오는 19일 개막하는 연극 ‘앙상블’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예수정.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배우 예수정(64)은 어린 시절 극장에 있었다. 배우 고(故) 정애란의 딸인 그에겐 서울 명동예술극장이 놀이터였다. 아기 땐 분장실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있었고, 다섯 살 때부턴 객석에서 어머니의 무대를 기다렸다. 극장에서 ‘댕’하고 공연을 알리는 소리만 들으면 왠지 편안하고 설?다.

올해 ‘무대 인생 40년’을 맞은 예수정은 지금도 극장에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한 열정과 애착으로 무대에 오른다. 지난 10일 서울 서교동 소극장 산울림에서 만난 그는 이날도 오후 내내 곧 올릴 연극 ‘앙상블’ 연습을 하느라 땀을 흠뻑 흘렸다. 데뷔 40주년 소회부터 묻자 그는 수줍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철이 덜 들어서 그런지 몇 주년 그런 건 잊고 사는 것 같아요. 그저 1년, 또 1년을 살아가고 연기할 뿐이죠.”

그가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한 건 아니다. 고려대 독어독문학과에 진학해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작품을 접하면서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극장은 시민 계몽의 공간’이라는 브레히트의 말에 매료됐어요. 굳이 사회가 아니더라도, 나 스스로를 계몽시킬 수 있고 더 나은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공간이 극장인 거잖아요.”

공식 데뷔작은 1979년 한태숙 연출의 ‘고독이라는 이름의 여인’이었다. “국립극장 배우셨던 조한희 선생님께서 대학 때 제 무대를 보셨는지 추천해 주셨어요. 한 선생님은 처음 저를 보시고는 ‘왜 그런 애를 소개시켜 줬냐’고 하셨다네요. 가까이서 말하는데도 잘 안 들릴 정도로 제 목소리가 작았거든요.” 그런데 대본 리딩 현장에서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며 캐스팅됐다. “평소 에너지가 별로 없어 보여도 무대에 오르면 저도 모르게 뜨거운 핏덩이가 밖으로 나오는 것처럼 힘이 솟더라고요.”

결혼 후 독일에 가면서 8년여의 연기 공백이 있었지만 그 기간에도 무대를 잊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집에서 마루 걸레질을 할 때도 꼼꼼히 하는 행위 자체가 앞으로 무대에 내 발이 단단히 세워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후 무대에 복귀해 ‘바다와 양산’ ‘과부들’ ‘밤으로의 긴 여로’ ‘하나코’ 등에 출연하며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2003년 ‘지구를 지켜라’를 시작으로 영화나 드라마 등에 출연하며 대중적인 인지도도 서서히 높아졌다. ‘신과함께’ 등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에도 네 편이나 출연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스스로를 ‘무명배우’라 칭했다. “‘40년 무명배우’란 타이틀이 오히려 좋은 것 같아요. 그만큼 무대가 좋아서 연기했거든요. 무명배우라 불리는 게 익숙하고 편해요.”

그는 오는 19일 개막하는 극단 산울림 창단 50주년 기념 연극 ‘앙상블’ 무대에 오른다. 지적 장애를 가진 서른다섯 살 아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어머니 이자벨라역을 맡았다. 연극 무대에 서는 것은 2년 만이다.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작품이에요.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결핍이 있는 존재를 한 번쯤은 만났었죠. 삶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그냥 흘려보내고 말았지만 무의식에 남겨졌을 법한 질문들을 던지는 작품이에요.”

오는 12월에는 연극 ‘메리 제인’에도 출연한다. 중증 뇌성마비를 앓는 아들을 가진 메리 제인의 곁에서 묵묵히 돕는 루디역을 맡았다.

영화와 드라마 활동도 꾸준히 할 계획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69세’와 tvN 드라마 ‘블랙독’에도 출연했다. “연극이 굵은 선을 제시하지 않는 척하며 훅 던지는 장르라면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선 내 안의 작은 비밀들을 동시대를 살고 있는 각양각색의 사람에게 열어보일 수 있죠.”

그는 앞으로도 스스로에게 엄격한 연기 잣대를 들이댈 생각이라고 했다. “40년 동안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기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야 종종거리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잖아요. 아직 그 경계를 못 넘어서고 있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자연스러움을 추구할 겁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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