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19세기 동아시아 상륙…주권 없는 조선 '열강 각축장'으로
동아시아 국제질서

1840년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청 제국이 5개 항구를 개방했다. 1853년 미국의 함대가 일본을 방문해 문호를 개방했다. 이후 동아시아의 바다를 서양의 군함과 상선이 지배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열렸다. 1876년까지 조선왕조가 동아시아 최후의 은둔자로 남은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조선과의 무역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양과 통상을 개시한 일본은 식민지화의 위기에 봉착했다. 1868년의 메이지(明治)유신은 그에 대응해 지방의 유력 군사세력이 왕정복고의 명분을 걸고 중앙의 막부(幕府)를 타도한 정치적 변혁이었다.

1869년 일본은 동래부의 왜관을 통해 메이지유신을 조선에 통고했다. 조선은 일본이 종전과 달리 그의 군주를 천황(天皇)으로 칭한다는 이유에서 외교문서의 접수를 거부했다. 이 같은 마찰은 1875년까지 세 차례나 더 반복됐다. 양국 관계는 험악해졌으며, 일본에서는 정한(征韓)의 여론이 일었다. 청은 일본의 조선 침공을 우려해 양국의 외교 수립을 권했다. 1875년 일본은 군함을 강화도에 파견해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를 계기로 1876년 세칭 강화도조약이 체결됐다.

일본과의 개항

동 조약 제1조는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고 했다. 일본은 이를 통해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부정할 요량이었다. 조선은 자신을 청과의 사대관계 속에서 자주하는 나라로 간주했기에 이 조항으로 청과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종래 강화도조약은 조선을 식민지로 이끈 불평등조약으로 인식됐다. 조약을 통해 부산 개항장에 일본인 거류지와 관리관청이 설치되고, 일본영사가 일본인을 재판하고, 수출입 무역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등 여러 주권이 침탈당했다는 이유에서다.

실은 그 모든 권리는 조선이 오랫동안 왜관에 허락해 온 것이었다. 조선은 일본과의 조약 체결을 1811년 이후 중단된 양국의 공식 외교를 회복하는 일 정도로 간주했다. 조선은 일본과의 수교 이후에도 천황을 칭하는 일본의 국서를 접수하지 않았다. 조선이 천황의 국서를 접수하는 것은 1880년이다. 일본이 한성에 변리공사(辨理公使)를 주둔시키는 것도 그때부터다. 이후 양국은 근대적 형식의 외교에 접어들었다. 근래의 연구는 이런 이유를 들어 강화도조약이 불평등조약이라는 종래의 통념을 부정하고 있다.

청의 조선 정책

1874년 일본은 청의 영토인 대만을 일시 침공했다. 1879년 일본은 류큐 왕국을 병합함으로써 청에 대한 도전적 자세를 명확히 했다. 청은 같은 일이 조선에서도 벌어질 가능성을 우려했다. 무엇보다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가 부동항을 구하기 위해 조만간 조선으로 진입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로 여겼다.

1880년 일본에 주재하는 청의 공사는 본국 정부에 조선이 떨어져 나가는 후환을 막기 위해 하루빨리 조선의 정치와 외교를 장악할 필요성을 건의했다. 청은 오랫동안 자치를 허락한 조선의 내·외정을 갑자기 장악하기는 힘들며, 조선으로 하여금 열강과 외교를 맺게 하는 것을 러시아와 일본의 조선 침공을 방지하는 득책으로 간주했다. 동년 8월 일본에 간 수신사 김홍집에게 청의 외교관은 《조선책략》이란 책을 전했다. 러시아의 남하가 임박한 위기 상황에서 조선의 살길은 중국에 사대하고 일본과 결탁하고 미국과 연대하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미국의 특명전권공사 파견에 대한 답례로 1883년 미국에 파송된 조선의 보빙사(報聘使) 일행.
미국의 특명전권공사 파견에 대한 답례로 1883년 미국에 파송된 조선의 보빙사(報聘使) 일행.
미국과의 통상조약

1882년 5월 청의 주선으로 조선과 미국의 통상조약이 체결됐다. 미국과의 협상에서 청은 조선이 그의 속방이라는 규정을 조약문에 넣고자 했으나 미국에 의해 거부됐다. 청은 조선에 강요해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확인하는 조회(照會·무엇을 알아보거나 알리기 위한 공문)를 발송케 했는데, 미국은 이를 무시했다. 미국은 조선이 수출입 무역에 관세를 부과하는 권리를 인정했다. 조선은 이를 바탕으로 관세 부과를 위한 조약의 개정을 일본에 요구했다. 1883년 4월 미국의 특명전권공사가 조선에 부임했다. 미국이 외교관의 지위를 그토록 높인 것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청의 압박에 눌린 조선 정부를 크게 고무했다.

불평등조약체제

자주외교를 위한 조선 정부의 노력은 1882년 7월에 발생한 임오군란으로 좌절됐다. 청은 자신이 책봉한 조선의 국왕이 폭도에 사로잡혀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3000명의 군대를 한성에 진입시켰다. 국왕 고종은 청 황제에게 사대에 충실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선 청과의 조약이 체결됐는데, 청의 황제가 번신(藩臣)에게 내리는 명령의 형식이었다. 동 조약은 서문에서 조선은 오랫동안 청의 번봉(藩封)이었다고 밝힌 다음, 시세의 변화에 따라 양국 상인이 바다로 통상할 수 있게 한다고 했다. 뒤이어 청은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외교와 재정 고문으로 조선에 파견했다.

청의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으로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지키려 했다.
청의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으로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지키려 했다.
1883년 11월 조선과 영국의 통상조약이 체결됐다. 이 조약은 조선을 둘러싼 불평등조약체제의 완성판이었다. 영국의 무리한 요구는 묄렌도르프의 무책임한 대응으로 쉽게 용인됐다. 영국인의 무조건 치외법권이 인정됐음은 물론, 조선의 연안과 내륙 모두가 영국 상인의 시장으로 개방됐다. 나아가 조선의 미개항 연안 어디서도 영국의 군함이 정박하고 관원을 상륙시킬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됐다. 영국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그 이유로 1884년 4월 영국은 공사가 아닌 총영사를 조선에 파견했다. 그러자 체면이 깎인 미국이 동년 7월 한성 주재 공사의 지위를 특명전권공사에서 변리공사 및 총영사로 격하했다.

러시아의 남진

1884년 7월 조선과 러시아의 통상조약이 체결됐다. 러시아 역시 영국이 조선에서 취득한 모든 권리를 향유했다. 러시아는 조선의 미개항 연안 어디서도 군함을 정박시키고 관원을 상륙시킬 수 있게 됐다. 동 조약 체결 후 고종은 러시아에 밀사를 보내 조선을 보호해 줄 것과 이를 위해 조선의 바다로 러시아 군함을 파송해 줄 것을 요청했다. 묄렌도르프가 본국 독일 정부의 사주를 받고 그 같은 공작을 벌였다. 그러자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해 온 영국이 1885년 5월 거문도를 점령했다. 조선의 국왕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그의 왕국을 열강의 각축장으로 제공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함대는 거문도의 영국 해군을 뚫고 동중국해로 진출할 능력이 없었다. 1886년 10월 청과 러시아 사이에 “러시아는 거문도를 비롯한 조선 영토의 어느 부분도 차지할 생각이 없음”을 밝힌 톈진(天津)협약이 성립했다. 이후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를 건설하고 육군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극동 정책을 전환했다. 청은 묄렌도르프를 소환하고 위안스카이를 감국대신(監國大臣)으로 파견해 조선의 내·외정을 감독했다.

일본의 국익선

1884년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하는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1885년 4월 청과 일본 사이에 톈진조약이 체결됐다. 양국은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향후 조선에 파병할 때는 상대국에 이를 통보할 것을 약속했다. 일본은 조선에서 청과 세력 균형을 이룬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그와 달랐다. 일본은 조선은 자주국이라는 종래의 입장에 대해 하등의 언급을 하지 않음으로써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현실로 인정한 셈이었다. 이후 4년간 일본은 조선에서 사실상 철수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정치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1889년 일본은 헌법을 공포해 혼란의 시대를 마무리했다. 일본의 군부는 자국의 국방정책을 수립했다. 일본이 두려워한 궁극의 적은 러시아였다. 조선은 일본의 주권선을 외곽에서 방어하는 국익선으로 설정됐다. 그 국익선이 러시아에 점령돼서는 곤란했다. 조선은 자신을 지킬 군대를 갖지 못했으며, 종주국 청은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할 능력이 없었다. 청을 몰아내고 조선에 걸린 국익선을 일본이 직접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1891년 러시아가 시베리아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하자 일본은 긴장했다.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을 서둘렀다. 러시아와의 본선전을 앞둔 예선전이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