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봉승무(白峰僧舞)''(캔버스에 유채,<90.9X39㎝>+<90.9X73.1㎝>)는 김흥수(81) 화백이 무용가 김백봉(金白峰)씨를 모델로 1978년에 그린 작품이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고깔에 감추오고/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조지훈의 ''승무''가 조려지는 그림이다.

김 화백은 1977년에 구상과 비구상,동양화와 서양화,음과 양을 한그림 속에 녹여 낸 이른바 조형주의(하모니즘) 작품을 내놓아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구상ㆍ비구상을 한 화면에 담아내고 동양과 서양의 특성을 조화롭게 표현하겠다는 발상으로 1970년대 후반에 우리 것을 소재로 많은 작업을 했다.

불상ㆍ승무ㆍ탑 등을 내세우고 그것과 조화되는 추상화를 나란히 놓아 하모니를 이루었다.

화사한 색채의 전통의상을 입고 승무를 추는 여성은 매우 생동적이며 율동감에 넘쳐 있다.

작가는 ''백봉승무''를 우리 전통적인 신앙의 종교적 행위이고 불교정신을 율동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내놓았다.

고상한 종교적 정신,승무의 율동적인 아름다움을 구상성으로 담아내고 색의 미묘한 아름다움,색의 다양한 변화,색의 신비로운 조화를 무지개에 비겨 추상성으로 처리했다.

구상성이 없는 아름다움과 조화를 추상성으로 변주,추상성이 승무의 구상을 뒷받침해 작품속에서 행위와 정신의 합일을 이루고 있다.

''백봉승무''는 42세라는 나이 차를 넘어 스승과 제자 사이로 결혼,숱한 화제를 뿌렸던 김 화백의 음양화합 정신이 내재된 작품이기도 하다.

''작가는 마땅히 주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김 화백의 주장이다.

그는 작품이나 생활에서 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돌올한 생각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김 화백은 우리 화단에서 입바른 소리 잘하기로 알려진 작가다.

그만큼 화제도 무성하다.

1949년 제1회 국전때는 ''악(堊)''(특선)과 ''나부군상''(입선)을 출품,두 점 다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나부군상''이 전시도중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떼어졌다.

이는 우리나라 국전사상 전시 중단의 최초 기록이다.

1963년에는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파리 청년작가 비엔날레 두 국제전 참가를 에워싸고 ''108인 연서파동''이 일어났다.

대표작가 선정이 미협 이사장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편파적인 구성이라는 데 불만을 품은 작가들이 공모전으로 국제전 참가 작가(작품)를 뽑으라고 들고 일어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주동자인 김흥수 화백은 대표작가 후보에 올랐지만 사양하고 자기 대신 권옥연 화백이나 이응노 화백을 넣어 달라고 추천,연서파동은 사심을 버린 정의감의 발로로 인정받았다.

김 화백은 "국제전에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제전에 출품할 바에야 상을 타야한다"고 주장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름만 가지고 지명하지 말고 작품을 보고 뽑으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월간art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