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 시대 '디젤차' 집착…AI에 2025년까지 30억유로 투자
임금격차로 AI 인력 해외 유출 등 문제
'AI시대' 손놓던 獨의 뒤늦은 후회…전기차도 늦은 발동
유럽에서 4차산업혁명을 착실히 준비 중인 국가로 우리에게 알려진 독일은 올해 디지털 전환에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독일 정부가 사실상 인공지능(AI) 분야에서 미국과 중국 등에 뒤처져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디지털 분야에서 종합정책을 발표한 점은 독일의 녹록지 않은 현실을 방증한다.

디젤 엔진에 대해 미련을 못 버리던 자동차 업체들도 올해 뒤늦게 전기차 시대로의 전환을 대대적으로 꾀하기 시작했다.

지난 2월 국회 4차산업혁명특별위원회 의원들이 '인더스트리 4.0'의 핵심 기관인 독일 공학한림원을 찾았을 때 독일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엿볼 수 있었다.

인더스트리 4.0'은 제조업에 정보통신기술(ICT)을 접목하는 독일의 민관 합동 전략으로, 4차산업혁명이 당면과제인 한국에서 모범사례로 꼽힌다.

이 때문에 의원들과 공무원들이 베를린을 찾아 한림원을 방문하고 벤처 진흥 시설을 둘러보는 것은 '유행'이 됐다.

전기·전자분야의 국제 표준에서 한국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독일 측에서도 반가운 손님이기도 했다.

그러나 4차산업혁명 특위 의원들의 한림원 방문 시 한림원 관계자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특위 의원들이 헤닝 카거만 한림원 회장에게 돌직구를 날린 탓이었다.

특위 위원장인 바른미래당 소속 김성식 의원은 "구글과 아마존, 페이스북 등 미국 IT 기업이 딥러닝 기술 등을 통해 세계 시장을 석권하는 데 독일에는 그런 기업이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더스트리 4.0을 수정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세계적 소프트웨어 기업 SAP 회장을 지낸 카거만 회장은 "구글과 페이스북, 아마존 등은 서비스 기업이다.

독일은 크게 염려하지 않는다"며 제조업 강국이라는 점을 부각했다.

그러자 김 의원은 "구글과 아마존 등을 서비스 기업으로만 보기 어렵다.

클라우드 등에선 기업 간 거래를 한다"면서 이들 기업이 제조업과 연결될 수 있는 인공지능(AI) 분야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카거만 회장은 "미국이 관련 분야에서 선점한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 인더스트리 4.0이 기업 간 비즈니스(B2B)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답했다.

카거만 회장은 B2B를 강조했지만 B2B와 B2C(기업과 소비자간 거래)의 경계가 희미한 4차산업혁명의 특징은 독일에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 체제에서 독일은 경제성장을 이뤄왔지만, 급속하게 변하는 정보기술의 흐름에 보조를 맞추지 못해왔다.

AI, 소셜미디어 플랫폼, 전자상거래, 클라우드 분야 등에서 미국은 멀찌감치 달아났고 중국마저도 독일을 앞지르는 분위기다.
'AI시대' 손놓던 獨의 뒤늦은 후회…전기차도 늦은 발동
독일이 자랑하는 자동차 분야도 전기차 시대로의 전환이 더딘 상황이다.

독일이 디젤차에 집착하는 가운데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서 미국 기업인 테슬라가 선도하고 있다.

자율주행차와 차량공유서비스에서도 미국에 한참 뒤처진다는 평가가 많다.

독일 사법부는 환경오염을 이유로 잇따라 도심에서의 노후 디젤차의 운행금지 결정을 내리는 데, 정부는 여전히 노후 디젤차의 개조 문제로 이를 해결하려고 매달린다.

지난해 메르켈 총리는 2020년까지 100만 대의 전기차를 보급하겠다고 약속했으나, 목표 달성 여부가 미지수다.

자동차 분야 등 기존 산업을 보호하려는 탓인지 이산화탄소 배출량 규제에도 다른 유럽 주요국가보다 상대적으로 미적지근한 행보를 보여왔다.

최근 유럽연합(EU)이 2030년까지 신규 자동차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021년 기준대비 37.5%까지 감축하기로 합의하자, 독일 정부 측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페터 알트마이어 경제에너지부 장관은 "독일은 애초 달성 가능한 현실적 목표를 수립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말했다.

자동차 업계도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축 목표가 높을수록 전기차 생산을 늘려야 하는데, 이 경우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지난해 총선에서도 이산화탄소 감축과 전기차로의 전환 문제를 놓고 메르켈 총리의 기독민주당은 사회민주당보다 보수적인 정책을 보였다.

여기에 디지털 사회의 기반이 되는 인터넷 속도는 경제협력개발국가(OECD) 회원국 32개국 가운데 25번째에 불과하다.

미래 경제에 대한 경고음이 곳곳에서 울리자 독일 정부는 올해 디지털화를 촉진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내놓았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 3월 집권 4기 내각을 구성하면서 총리실 산하에 디지털 부서를 만들었다.

수장은 차관급이지만 내각 회의에 참석하도록 해 힘을 실어줬다.

나아가 독일 정부는 디지털 시대로의 변화를 중심 국정과제로 설정하고 지난달 14∼15일 메르켈 총리 주재 아래 전(全)연방부처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연방 내각 디지털 회의를 열었다.

독일 정부는 이 자리에서 2025년까지 AI 분야에 30억 유로 (약 3조8천300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하며 AI 등 디지털 분야에 총력전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AI 분야의 핵심 연구진을 양성하고 AI 분야 중소기업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 4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디지털 서밋에서도 독일 경제의 핵심인 중소기업을 일컫는 말인 '미텔슈탄트(mittelstand)'가 디지털 시대에 뒤처져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우리는 (디지털 분야에서) 세계적인 선도기업을 갖고 있지만, 많은 미텔슈탄트가 충분히 디지털화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정부 부문에서도 미텔슈탄트를 돕기 위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메르켈 총리는 "AI는 우리가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알고리즘에 허비하는 시간을 줄이고 창의력을 발휘할 시간을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동차 업계도 뒤늦게 전기차 및 무인차 시장에 대대적인 투자를 예고했다.
'AI시대' 손놓던 獨의 뒤늦은 후회…전기차도 늦은 발동
30일 dpa 통신에 따르면 폴크스바겐은 2023년까지 440억 유로(56조2천700억 원)를 미래 기술에 투자하고, 이 가운데 300억 유로(38조3천600억 원)를 전기차에 투자할 계획이다.

폴크스바겐의 고급 자동차 브랜드인 포르셰는 지난 9월 앞으로 디젤차 개발을 중단하고 가솔린과 전기차 개발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BMW도 2025년까지 전기차 25종을 출시하고 이 중 절반을 순수전기차 모델로 채우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독일은 한국과 중국 기업으로부터 대부분 수입해온 전기차 배터리를 자국에서 생산하는 데도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가뜩이나 전기차 시대가 될 경우 투입 노동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노조 측이 일자리 확보를 위해 이런 요구를 하고 있다.

산업계에서도 전기차 배터리가 부가가치가 높은 만큼 배터리 공장을 지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에 독일 정부는 자국 기업의 배터리 생산을 위해 2021년까지 10억 유로(1조2천700억 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독일 정부의 이런 방안이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독일의 정보기술협회인 BITKOM은 지난 27일 성명을 내고 "독일이 AI 분야를 선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다"면서 정부가 지원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특히 AI 특성상 관련 인력을 배출하는 대학과 인근에 있는 기업이 유기적으로 협력해야 하는 데 독일은 이런 구조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볼프강 발스터 독일 인공지능 연구센터장은 정부의 디지털 전략 발표 후 일간지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에 AI 분야 등의 전문가들이 임금문제로 해외로 유출되는 현상을 해결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