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 요청 없어도 명예훼손 인식하면 삭제해야"

당사자의 삭제 요청이 없었더라도 명예 훼손이 명백한 댓글 등을 방치했다면 포털 사이트에 배상책임이 있다는 판결이 확정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영란 대법관)는 16일 김모 씨가 NHN과 야후코리아 등 4개 포털 사이트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전원일치로 김씨에게 3천만 원을 지급하도록 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씨의 여자친구는 2005년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미니 홈피에 `딸이 남자친구 때문에 억울하게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고 이 때문에 홈피 방문자 수가 급증하고 김씨를 비방하는 게시물이 이어졌다.

몇몇 언론사가 이를 기사화해 포털 사이트에 실렸고 여기에 숨진 여자친구의 실명 등의 정보와 김씨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댓글이 폭발적으로 게시되자 김씨는 명예훼손 등에 따른 피해를 배상하라고 소송을 냈다.

1심은 "기사에 김씨의 실명이 거론되지 않았지만 숨진 여자친구의 실명과 미니홈피 주소 등을 통해 당사자가 김씨라는 게 드러나고 포털이 비방 댓글을 방치해 명예가 훼손되도록 한 책임이 있다"며 1천6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포털들은 이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2심 재판부는 "포털 사이트는 인터넷을 통한 월등한 배포 기능과 기사 배치, 제목 수정 등 편집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언론이 공급한 기사를 독자에게 제공하는 `유사 취재' 기능을 지니고 있어 언론매체로 봐야 한다"고 판시하고 배상금을 3천만 원으로 증액했다.

대법원은 "포털은 명예를 훼손하는 게시물에 대해 당사자에게 삭제ㆍ차단 요청을 받은 경우가 아니라도 그 존재를 인식했고 기술적ㆍ경제적 관리ㆍ통제가 가능하면 이를 삭제하고 유사한 내용이 내걸리지 않게 처리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이어 "포털이 제공한 기사와 지식검색란의 답변, 개인 홈페이지 등에 김씨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음이 명백하므로 차단하거나 통제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책임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그러나 포털이 명예훼손 등에 따른 배상책임을 우려해 지나치게 간섭하면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전제한 뒤 "불법성이 명백한 게시물로 타인의 권리가 침해될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고 사업자의 관리 능력이 미칠 수 있는 범위에 한해 주의 의무가 있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대법원은 아울러 포털이 선별해 뉴스난에 게재했고 이것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다면 언론매체와 마찬가지로 배상책임이 있다는 점을 들어 제공받은 기사를 임의로 삭제할 수 없다는 약정이 있어도 포털 측에 면책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한편, 박시환ㆍ김지형ㆍ전수안 대법관은 원심이 정당하다는 결론에는 동의했으나 자유롭고 신속한 의견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인터넷의 장점을 살리려면 게시물로 인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을 때만 삭제 의무가 인정되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피해자의 요청이 전제돼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이한승 기자 sewonlee@yna.co.krjesus7864@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