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없어도 잘 돌아가요"…'밸브'의 파격
‘CEO 없음(boss free)’

미국 워싱턴에 있는 비디오게임 개발업체 ‘밸브’의 웹사이트 기업소개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직원 300여명이 일하는 이 회사에는 최고경영자(CEO)가 없다. 1996년 설립된 이후 16년간 CEO 없이 운영돼온 것.

CEO뿐만 아니라 직급도 없다. 따라서 승진도 없다. 직원들은 프로젝트에 따라 팀을 짜서 일한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팀장을 뽑지만 프로젝트가 끝나면 그는 더 이상 팀장이 아니다. 팀 구성도 프로젝트에 따라 이뤄진다. 모든 책상엔 바퀴가 달려 있다. 자신이 원하는 프로젝트가 생기면 자유롭게 자리를 이동해 일할 수 있는 시스템 중 하나다. 연봉은 동료들의 평가에 따라 결정된다. 직원을 새로 고용하거나 해고할 때도 마찬가지다. 근무시간도 자율적이다. 언제 어디서든 맡은 일만 해내면 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9일(현지시간) CEO 없이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밸브의 독특한 조직문화를 소개했다. 이 회사는 최근 팀 쿡 애플 CEO가 방문해 화제가 됐다. 애플이 ‘입는 컴퓨터(wearable computer)’를 밸브와 함께 개발하고 있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기술력도 뛰어나다.

밸브의 이런 기업문화는 최근 경영학 渶� 연구에 자주 등장한다. 밸브처럼 조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사내 중간관리 조직을 축소하거나 아예 직급을 없애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오와주립대와 텍사스A&M대가 공동으로 연구한 결과, 밸브와 같은 수평적 조직에서 조직원의 업무 역량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직원들이 모두 ‘내 회사’라는 자세로 책임감을 갖고 일하기 때문이다. 이 연구를 담당한 스티븐 코트라이트는 “일반적인 직급체계를 갖고 있는 조직보다 밸브 같은 조직에서 직원들이 서로 더 협력하고 독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는 “CEO나 관리자가 없어 모두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갖춘 좋은 관리자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혁신을 중시하는 기업문화도 장점이다. 직급에 관계없이 조직원 누구나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어 혁신적인 기업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CEO 없어도 잘 돌아가요"…'밸브'의 파격
단점은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책임 있는 결정을 하고, 이를 밀어붙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의사결정이 느려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WSJ는 “프로젝트 초기 구상 단계에서는 의사결정이 늦어져 일의 진행 속도가 더딜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일단 계획을 세우면 이를 실행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조직원 모두 책임감을 갖고 일을 해나가기 때문이다.

제너럴일렉트릭(GE) 항공부품 사업부도 밸브처럼 직급을 없앴다. 20년 전 일부 공장에 시범적으로 팀제를 도입한 뒤 최근 전 사업장으로 이를 확대했다. 기능성 섬유업체인 고어텍스도 1958년 설립 이후 지금까지 직급 없는 팀제로 운영돼왔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