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머나먼 나라일 뿐이었다. 오랜기간 한국은 미국만 바라보고 달려왔고,경제규모가 커진 이후에도 일본과 중국 너머로 관심 범위를 넓히지 못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유럽대륙이 하나로 뭉쳐 '유럽합중국'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전환기를 맞이한 상황에서 유럽은 더 이상 관심 밖의 대상으로만 남을 수 없게 됐다. 세계 최대의 경제블록으로 국제무대에서 발언권을 강화하고 있는 유럽연합(EU)과의 관계강화는 싫든 좋든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유럽합중국 시대에 대비하는 5계명을 제시했다. 철저히 준비해 새롭게 열린 신유럽에서 승자가 되자는 조언이다.

(1) EU전담조직 만들자

그동안 상대적으로 접촉이 적었던 유럽에 대한 한국의 인식은 단순한 수준을 넘지 못했다. 독일 프랑스 등 개별국가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 있었지만 유럽을 통할하는 EU에 대해선 제대로 된 인식이 없었다.

아직까지 EU를 전담하는 외교조직조차 갖추고 있지 못한 것이 유럽에 대한 인식정도를 잘 설명해준다. 외환위기 당시 예산절감 차원에서 벨기에대사관과 주EU한국대표부가 통합된 뒤 벨기에대사관이 EU관련 업무도 병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 · EU기본협력협정 등으로 한 · EU관계가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됐지만 외교통상부 내에 EU국조차 없다. 개별기업들도 EU관련 조직을 갖춘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EU대표부를 전면적으로 확대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되는 이유다.

반면 일본과 중국은 외교인력을 대거 EU조직이 밀집한 브뤼셀에 파견하고 있다. 일본은 21세기 들어 EU가 미국 중국을 제치고 최대 투자처로 부상했다. 중국도 수백여명의 전문가를 EU전담부서에 배치했다.

(2) '親韓인사' 끌어들여라

유럽에선 정부든,기업이든,개인이든 한국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관심을 가진 인사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 일본과 한국의 차이를 유럽에 인식시키는 작업이 시급하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지한파'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아쉽게도 올해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서 소수나마 존재하던 지한파 의원들이 대부분 낙선했다. 유럽의회에 새로 진출한 지한파 내지 친한(親韓)인사를 적극 발굴해 상호 이해를 넓혀야 한다. 국회도 유럽의회와의 상호교류를 확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 한국 상품과 문화가 유럽시장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선 중국 일본과 대비되는 한국만의 독자성을 온전히 알릴 필요가 있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약한 동유럽에 집중투자한 기업들도 이제 유럽의 핵심부로 눈을 돌릴 때다. 친한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선 개인 인맥에 의존하는 수준을 넘기 위한 시스템적 접근이 요구된다.

(3) 로비활동 강화해야

한국적 정서상 '로비'는 부정적 인상을 준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기업들이 EU에서 제대로 활동하기 위해선 EU를 대상으로 한 로비는 필수조건이다. EU 회원국에서 제정되는 법률의 약 80%가 EU집행위와 유럽의회에 의해 발의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EU집행위에만 1만8000명이 넘는 관료들이 활동하고 있다.

앞으로 수출과 관련한 반덤핑 규제를 회피하기 위한 수준의 단편적인 로비활동에서 벗어나 현지 기업 활동과 관련된 EU규제에 대비하기 위한 로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국내 기업들의 높아진 EU 내 위상을 감안할 때 한국이 주요 타깃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EU집행위에 공식 등록된 로비스트 수는 지난 11월 말 현재 2154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는 구글 소니 등 기업이 289개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일본자동차공업협회와 70여개 회원사를 대표하는 유럽일본상공회의소가 왕성한 로비를 하고있다. 한국도 한 · 미 재계회의와 유사한 한 · EU재계회의 발족이 시급하다.

(4) '벨기에 모델' 벤치마킹

EU가 한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은 것은 한국만의 독특한 지정학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EU는 중국 일본과는 무역이나 국제정치 무대에서 경쟁자로서 직접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상대적으로 한국은 유럽 입장에선 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을 견제할 교두보로서 가치가 부각된다고 할 수 있다. EU의 대한투자가 꾸준히 늘고 있고,미국보다 투자규모가 크다는 점을 봐도 EU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얼마나 높게 평가하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 입장에서도 EU와의 관계 강화는 무역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부품소재 분야가 강한 EU와의 협력은 한국경제의 고질적 문제점인 대일무역역조를 완화시킬 수도 있다. 한국은 EU라는 지렛대를 잘 활용해 아시아의 교역허브,금융허브로 도약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유럽의 소국 벨기에가 독일 프랑스 등 강대국의 역학관계를 활용해 유럽합중국의 중심지로서 국력 이상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점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5) 대기업·中企 함께 뛰어야

한국의 EU수출은 선박 휴대폰 자동차 등 대기업 생산 품목에 집중돼 있는 상황이다. 대다수의 중소기업들은 정보 및 기술력 부족으로 유럽 진출을 시도조차 못하는 경우도 많다. 한 · EU FTA로 한국과 유럽 간 고속도로가 개통됐지만 제대로 달리는 차가 거의 없는 텅빈 상황에 비유될 수 있다.

이 같은 대기업 편중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선 장기적 관점에서 중소기업들의 유럽 진출을 체계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유럽시장에서 어떤 기업,어떤 제품들이 경쟁력이 있을지 냉정히 판단한 뒤 꼼꼼히 진출전략을 짜야 한다. 유럽통합이 빨라지고 있지만 EU 내에서 통용되는 언어만 20여개나 되고,국가별로 유구한 문화 · 역사적 특성을 지닌 점도 간과돼선 안 된다. 유럽의 다양한 언어와 역사,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사회 전반적인 인력풀을 확대하는 것도 유럽합중국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도움말=김득갑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연구실장

정리=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한경·삼성경제연구소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