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의 최고 실력자로 올라선 후진타오 총서기. 그는 10년을 단위로 정치적 도약을 이룬다. 지난 72년 문화혁명의 회오리 바람에 휘말려 쫓겨갔던 간쑤성 노동현장에서 정치인생의 길을 열어준 후견인을 만나게 된다. 원로 정치인 송핑이 그였다. 후진타오는 송핑의 도움을 받아 중앙 정치무대에 첫 발을 내딛게 된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82년,후진타오는 당 지도자의 등용문인 중앙위원회 진입에 성공했다. 또 10년이 지난 92년,최연소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랐다. 신진 정치세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덩샤오핑의 결단이었다. 그리고 2002년 그는 최고권력인 총서기에 '등극'한 것이다. 후진타오는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정치인'이었다. 그의 정치 연설은 언제나 "덩샤오핑 이론과 장쩌민 주석의 3개대표이론을 이어받아…"로 시작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베이징의 정치분석가들은 "기회가 올 때까지 몸을 굽힐 줄 아는 정치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차분하면서도 치밀했고,공적은 언제나 상사에게 돌렸다. 지난 1984년 5월 공청단(共靑團) 제2서기였던 그에게 3천명에 달하는 일본청년 방중(訪中)단 접견 명령이 떨어진다. 그는 수 차례의 리허설을 통해 완벽하게 행사를 치러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공을 당시 공청단 제1서기였던 왕자오궈 통일전선공작부 부장에게 돌렸다. 당시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은 이일로 후진타오를 신임하게 됐고,왕자어궈는 후진타오의 정치적 동반자가 됐다. 그를 잘 아는 신화통신의 한 기자는 "남을 감동시켜 동지를 규합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렇다고 후진타오가 우유부단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필요하다 싶으면 과감한 결정도 내린다. 그는 티베트 당서기로 재직하던 지난 1989년 3월,티베트 분리독립 폭동을 탱크로 진압했다. 3일 동안 이뤄진 '피의 진압'이었다. 후 총서기의 고유 정치철학은 아직 구체화되지 않고 있다. 그는 공산당의 지도노선인 사회주의 시장경제,덩샤오핑 이론,장 주석의 3개대표 이론을 앵무새처럼 외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개혁 성향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그는 개혁파의 거두인 덩샤오핑과 후야오방으로 부터 정치를 배웠다. 일부 전문가들은 후 총서기가 농촌 촌장의 직접선거 실시를 주장,정치적 민주화에 비교적 관심이 많다고 분석하고 있다. 베이징=한우덕 특파원 woody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