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인'은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명작 '8½'(1963)을 할리우드 방식으로 리메이크한 영화다.

롭 마셜 감독은 원작의 철학적 무거움을 덜어낸 대신 풍성한 볼거리로 치장했다.

천재 감독 귀도(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9번째 영화 '이탈리아'에 착수하지만, 상상력이 고갈돼 시나리오 집필조차 시작하지 못한다.

슬럼프 탈출을 위해 이탈리아의 한 휴양지로 떠난 귀도는 정부인 칼라(페넬로페 크루즈)를 그곳으로 불러 유희를 즐기지만, 갑자기 아내 루이사(마리온 코틸라르)와 영화 스태프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그의 휴양 계획은 꼬이기 시작한다.

영화 '나인'의 이미지는 화려하다.

데뷔작 '시카고'(2002)로 아카데미 6관왕을 거머쥔 마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대니얼 데이 루이스, 니콜 키드먼, 페넬로페 크루즈, 주디 덴치 등 출연진도 호화롭다.

제작비도 뮤지컬 영화로는 최대인 1억달러(약 1천180억원)가 들었다.

상당한 규모의 인적ㆍ물적 자원을 쏟아부은 이 영화는 매끈하다.

배우들의 힘도 있지만, 뮤지컬을 중간 중간 삽입하며 괜찮은 리듬감을 이끌어낸 마셜 감독의 연출력이 더 돋보인다.

마셜 감독은 '게이샤의 추억'(2005) 같은 정극보다는 뮤지컬 영화를 찍을 때 그의 재능이 더욱 돋보인다는 사실을 이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뮤지컬 장면은 역시 뛰어나다.

마셜 감독은 '시카고'보다 더욱 진일보한 비주얼과 무대 연출력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로마 뒷골목의 여인 사라기나(스테이시 퍼거슨)가 나오는 귀도의 회상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훌륭하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가 흐르는 가운데 컬러와 흑백을 빠르게 교차시켜 독특한 미감을 선보인다.

페넬로페 크루즈, 주디 덴치, 케이트 허드슨 등 6명의 여배우가 보여주는 뮤지컬도 음악과 영상이 잘 어울린다.

귀도가 로마에 돌아와 자신의 영화 작업을 시작하는 이 영화의 후반부는 다소 느슨하지만, 그 이후 다시 탄력이 붙으며 영화는 빠르게 전개된다.

그래서 2시간 남짓한 상영시간도 관객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을 것 같다.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만큼 마셜 감독은 안전한 서사구조를 선택한 듯해 보인다.

원작이 주는 깊이와 난해함은 줄었다.

상상력을 회복하려는 귀도의 고민은 가볍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그의 행동은 유치하다.

격조 있는 대사와 환상적인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펠리니 감독의 '품격'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31일 개봉. 15세 관람가.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buff27@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