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어난 한 도마뱀. 자기가 세상에 살아남은 마지막 도마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겨워하던 가족들도, 싫어하던 친구들도 모두 사라졌지만 문제는 외로움. 도마뱀은 지는 해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아무도 없다면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가을의 시작과 함께 쿨한 사랑이야기 한 편이 9월 1일부터 관객들을 만난다.


태국 감독 렌엑 라타나루앙이 메가폰을 잡은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Last Life In The Universe)가 그것. 세상 끝에 혼자 살아 남은 도마뱀은 이 세상에서 좀처럼 존재감이 없어보이는 두 남녀 주인공의 다른 모습이다.


자살하고 싶어하는 결벽증의 일본 남자 켄지(아사노 다다노부). 그가 죽고 싶은 이유는 빚이나 실연 혹은 절망 때문은 아니다.


그저 잠을 자다 깨어보면 새로운 인생이 되는 것, 그게 그가 꿈꾸는 최상의 행복이다.


그는 이국땅 태국에서 살고 있는 일본인이다.


답답할 정도로 정리를 잘하는 게 특징이자 장점. '최상의 행복'을 위해 자살을 하려 하지만 매번 제대로 시도를 해보지도 못한다.


자유로움 속에 쓸쓸함이 묻어있는 태국 소녀 노이(시니타 분야삭). 항상 담배를 입에 물고 다니며 남자관계도 복잡한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아쉬울 게 없는 태국을 떠나려 한다.


그녀가 가려는 곳은 일본의 오사카. 곧 떠나는 까닭에 그녀가 살고 있는 해변의 집은 쓰레기장 수준으로 지저분하다.


이들이 서로 만나게 된 곳은 한 다리 위다.


이날도 어김없이 겐지는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노이는 여동생 니드와 다투고 있던 참이다.


다리 위에서 자살하려던 겐지를 보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니드. 마침 그날 밤 겐지의 형 유키오 역시 누군가에게 살해당한다.


너무 다른 두 사람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외톨이라는 것. 각각 형과 동생을 잃은 두 사람은 희망찬 미래 따위를 꿈꾸기에는 너무 지쳐 있다.


이날 만난 인연으로 두 사람은 노이의 집에서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이것저것 어지르는 노이와 깔끔하게 치우는 겐지, 두 사람은 서툰 영어로 서로 대화를 나누며 서로 자신을 조금씩 열어간다.


결국 함께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꿈을 꾸게되는 이들, 하지만 이들을 둘러싼 세상은 여전히 장밋빛만은 않다.


'69', '몬락 트랜지스터' 등으로 주목을 받은 바 있는 태국의 신예 펜엑 라타나루앙은 세상의 끝에 있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느리지만 꽉 찬 미쟝센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세상 끝의 나른함에서 문득 생겨난 사랑의 감정을 차분한 말투로 보여주며 외톨이로 흩어져 있는 현대인들의 슬픔을 어루만진다.


속이 텅 비어있는 듯한 공허함과 무중력 상태에 홀로 붕 떠 있는 것 같은 외로움, 그 속의 인물들은 쉽게 세상과 친해지려 하지 않아 쿨하고,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이들이 사랑의 감정으로 연결되는 영화는 그래서 따뜻하다.


쿨(Cool)하면서도 따뜻한 이 영화가 묘한 설렘과 함께 울림을 주는 것은 왕자웨이의 카메라 감독으로 유명한 촬영 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의 덕이 크다.


건조한 그의 카메라는 지쳐있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외톨이의 슬픔에서 사랑의 희망까지 다양한 감정들은 그의 카메라를 통해 일관되게 쿨함을 유지하고 있다.


매력적인 러스브토리가 항상 그렇듯 일본 배우 아사노 다다노부와 태국의 여배우 시니타 분야삭의 연기 역시 빛이 난다.


아사노 다다노부는 이 영화로 2003년 베니스 영화제의 업스트림 부문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상영시간 118분, 15세 이상 관람가.


(서울=연합뉴스) 김병규 기자 bkki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