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하기 참 힘든 나라

대통령 말, 정부정책 따로따로…부글부글 끓는 기업들

문 대통령 '투자활력' 지시에도…최저임금, 바뀐 것 하나도 없고
협력이익공유제·카드수수료 등 기업 옥죄는 규제들만 수두룩

재계 "겉으론 정책 바꾼다더니 대통령 말에 신뢰 가겠나" 분통

이 와중에 노조·시민단체 가세
채용 압박에 파업 리스크까지…기업들 "더 못버티고 쓰러질 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소위 위원장인 임이자 자유한국당 의원이 여야 의원들과 26일 국회에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심의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태년·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 임 위원장, 김동철 바른미래당 의원, 이장우·신보라 한국당 의원.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소위 위원장인 임이자 자유한국당 의원이 여야 의원들과 26일 국회에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심의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태년·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 임 위원장, 김동철 바른미래당 의원, 이장우·신보라 한국당 의원.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정부가 이제 대통령 지시도 안 듣나 봅니다. ‘최저임금 제도를 보완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지 사흘 만에 사실상 원안 그대로 최저임금법 시행령을 차관회의에서 통과시켰잖아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4대 그룹 계열사 사장)

“정부의 일자리 정책은 순서부터 잘못됐어요. ‘일거리’가 있어야 ‘일자리’도 생기는 것 아닙니까. 새로운 일거리를 규제로 죄다 막는데 어떻게 일자리가 나오겠어요.”(스타트업 A사 대표)

기업인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국내외 경영 여건이 눈에 띄게 나빠지는데도 정부와 여당은 여전히 ‘진영 논리’에 갇혀 기업들의 ‘손과 발’을 옥죄는 규제만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 “대통령 말도 안 먹히나”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7일 확대경제장관회의에서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은 국민 공감 속에서 추진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요한 경우 보완조치도 함께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만 해도 재계는 곧 납득할 만한 후속조치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지난 20일 차관회의에서 재계가 강력 반발하는 최저임금법 시행령 개정안이 통과되자 분위기는 돌변했다. 그동안 말을 아끼던 기업인들마저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낼 정도로 단단히 화가 난 모습이다.

정부와 여당이 밀어붙이고 있는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에도 ‘산업 재해를 줄이자’는 당초 취지에서 벗어나 기업을 과도하게 괴롭히는 독소조항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는 게 재계의 하소연이다. “현행법만 제대로 지켜도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데 과잉 입법을 하고 있다”(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지적은 학계에서도 나오고 있다. 지난 10일 문 대통령이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건넨 “기업의 투자 애로를 찾아 해법을 모색하는 데 각별히 노력해달라”는 당부도 실현되기 어렵게 됐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기업 어찌되든 규제폭탄 쏟아내…氣 살린다더니, 정부가 뒤통수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문 대통령은 기업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는데, 주변에서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는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정부가 주최한 간담회에서 한 기업 대표가노동 정책을 비판했더니, 정부 측 관계자가 말을 끊고는 ‘재벌들이 그동안 노동자 착취해서 돈 벌었으니 이제는 그러면 안 된다’고 훈계하더라”며 “정부가 도대체 기업의 얘기를 듣겠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재계는 대기업 오너의 의결권 행사를 제한하는 지주회사법 및 상법 개정안을 비롯해 협력이익공유제, 복합쇼핑몰 규제,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등 시장 경제에 반하는 정책들도 원안 그대로 추진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말로만 규제 완화 외치는 정부

정부는 겉으로는 규제 완화를 외치고 있다. 기재부가 내년 경제정책의 우선순위로 ‘전방위적 경제 활력 제고’와 ‘경제체질 개선 및 구조개혁’을 제시한 게 대표적이다. 그동안 규제로 발이 묶였던 현대자동차그룹의 서울 삼성동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프로젝트와 SK하이닉스의 경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를 범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겠다는 입장도 내놨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기업인은 많지 않다. 실제 인허가 단계가 되면 말이 달라진 사례를 수없이 겪어서다. 대기업 A사 관계자는 “SK하이닉스의 용인 공장을 허용하면 기존 낸드플래시 제조공장이 있는 충청북도(청주) 의원들부터 들고일어날 것”이라며 “산업부가 밀어줘도 국토교통부와 환경부가 꼬투리를 잡으면 한발짝도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노조와 시민단체들은 “그나마 여유가 있는 대기업들이 채용을 늘리고 투자를 확대하라”고 기업을 압박한다. 대기업 B사 관계자는 “얼마 전 정부 관계자를 만났더니 ‘저금리인데 왜 투자하지 않느냐”고 묻더라”며 “한국의 기업 환경을 감안하면 수익을 내기 힘든데 금리가 낮다고 투자를 하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한국과 미국의 경영 환경을 현대차와 GM의 사례로 설명했다. GM은 지난달 말 세계 7개 공장을 폐쇄하고 1만4700명을 감원하겠다는 구조조정 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2년 연속 사상 최대 영업이익(40조원)을 낸 상황에서 군살빼기에 나선 것이다. 반면 현대·기아차 노조는 회사가 비상경영을 펼칠 정도로 위기 상황인데도 지난 6일 광주형 일자리 추진에 반대하며 ‘4시간 불법 파업’을 했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 호황기에 붙은 군살을 빼야 하는 시기지만 기업들이 정부 눈치를 보느라 구조조정을 주저하고 있다”며 “경쟁에서 낙오한 기업은 퇴출된다는 냉엄한 현실을 아는 사람이 정부와 청와대 안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좌동욱 기자 leftk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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