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라만 볼 뿐… > 작년 3월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가운데), 아베 신조 일본 총리(오른쪽)가 헤이그에 있는 미국대사관에서 한·미·일 정상회담을 열고 서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바라만 볼 뿐… > 작년 3월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가운데), 아베 신조 일본 총리(오른쪽)가 헤이그에 있는 미국대사관에서 한·미·일 정상회담을 열고 서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부실한 외교가 경제에 부담을 준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미국 일본 중국 등 강대국 사이에서 전략적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경제까지 타격을 입고 있다는 진단이다.

'외교 실패'에 발목 잡힌 경제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참여와 미국의 고(高)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도입을 둘러싸고 혈맹인 한·미 관계에 일부 균열 조짐이 나타난 뒤 한국은 미국의 환율 견제를 받고 있다. 과거사 문제로 수년째 얼어붙은 한·일 관계는 대일 수출과 일본인 관광객 급감으로 이어졌다.

박근혜 정부 들어 원화 가치는 줄곧 ‘나홀로 강세’ 기조를 보였다. 엔화 대비로는 최근 1년 새 16% 이상 올랐고, 유로화에 비해서도 13%가량 상승했다. 미국 달러화와의 상대적 가치를 비교하면 차이는 더 극명하다. 엔화 가치는 최근 3년간 달러화 대비 51.1% 떨어진 반면 원화 가치는 7% 이상 올랐다. 그만큼 해외시장에서 한국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 것이다.

수출 전선엔 비상이 걸렸다. 현대자동차는 올 1분기에만 환율 변동으로 3500억원가량의 손해를 봤다. 하지만 외환당국으로부터는 그 흔한 ‘구두개입’도 나오지 않는다. ‘스무딩 오퍼레이션(환율 미세 조정)’이라는 특유의 수사(修辭)도 사라진 지 오래다.

한 금융회사 최고경영자는 “지금 정부가 환율정책에 관심이나 있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정부가 원화 강세에도 속앓이만 하고 있는 원인으로는 외교 실패를 꼽았다. 미국과의 매끄럽지 못한 외교관계가 외환정책의 융통성을 제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황은 곳곳에서 포착된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미국 재무부가 올초 우리 정부에 ‘환율 개입을 하지 말라’는 비공식 경고를 했다”고 전했다.

노골적 엔저 정책에 눈감은 미국…한국엔 "환율 개입 말라" 경고

'외교 실패'에 발목 잡힌 경제
“한국은 원·달러 환율보다는 원·엔 환율 때문에 기업 수출경쟁력이 떨어져 고민하고 있다”고 해명했지만 되레 “한국이 그래서 환율시장에 개입하고 있느냐”는 타박만 들었다고 한다. 노골적인 엔저(低) 정책에도 미국으로부터 별다른 지적을 받지 않고 있는 일본과 대조적이다. “한·미 동맹 관계는 빛 샐 틈도 없는 역대 최상”이라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평가와도 거리가 멀다.

물론 외교 탓만으로 돌리긴 어렵다. 지속적인 경상흑자 등 원화가치를 높인 요인은 여러 가지다. 하지만 외교 전략에 대한 경제계의 시각은 곱지 않다. 증권사 리서치센터 관계자는 “환율은 결국 외교력의 산물 아니냐”며 “지난 정권의 환율관리에 대해선 별 말이 없던 미국의 태도가 이렇게 변한 건 그쪽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외교 실책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했다.

일본과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3년째에 접어들었지만 아직 한·일 정상회담은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분위기다. “과거사에 대해 사과부터 해야 한다는 원칙론이 대일외교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소원해진 양국 관계는 경제 지표로도 확인된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은 228만명. 2012년(351만명) 대비 35% 급감한 것이다. 올 들어서도 지난 3월까지 50만명에 그쳤다. 양국 교역액(수출+수입)도 지난해 859억5200만달러에 그쳤다. 교역액은 3년 연속 감소하며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던 2009년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다.

통상 분야도 삐걱거리고 있다. 미 정부 고위 관계자가 최근 털어놓은 비화(秘話)는 한국 외교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이 관계자는 “2013년 초 미국은 한국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를 요청했지만 한국은 ‘바쁘다’며 거절했다”고 전했다. 당시 한국은 중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한·중 FTA가 타결된 뒤엔 한국의 태도가 180도 변했다. 당장 TPP에 참여하고 싶다며 오히려 채근했다”는 말도 보탰다.

중국 쪽을 신경쓰다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고 말았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장은 “최근 미국에 대한 외교정책 조율이 잘 되지 않고 있다”며 “전통적 우방인 미국을 중국과 같은 저울로 따지는 건 위험하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쌀시장 추가 개방’이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도 불안한 징후다. 대니얼 러셀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는 최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쌀시장 추가 개방 여부는 (TPP 협상을 벌이고 있는) 일본에도 큰 이슈”라며 “일본이 한다면 한국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공격적 대미 외교 행보와 이로 인한 미·일 양국의 신밀월(新蜜月) 분위기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허 원장은 “일본은 미국과 군사적 동맹을 강화하면서 엔저와 양적 완화에 대해 미국의 용인을 받았다”며 “우리보다 일본이 전략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렇다고 대중(對中) 관계에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지분율 확보 등 실리를 챙긴 것도 없다. 임호열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국제협력정책실장은 “당초 4% 이상 지분율을 확보할 것이라고 봤지만 막판에 러시아 등 큰 나라들이 잇따라 회원국이 되면서 한국 지분율은 예상보다 낮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존재감을 크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아시아개발은행(ADB) 내 한국 지분율은 5.06%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