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어음(CP)이 한국 경제를 흔들고 있다. 동양 STX그룹 등 굴지의 기업들이 만기가 돌아온 CP를 갚지 못해 유동성 위기에 봉착하며 경제 전반에 주름을 드리우고 있다. 일부 대기업 오너 경영인들은 불법 CP 발행 문제로 실형을 선고받거나 검찰 수사를 받는 수난을 겪고 있다. 고통을 잊기 위해 대증적으로 처방하는 모르핀처럼 기업들이 자금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손쉬운 CP에 매달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달콤한 '유혹' 기업어음…CP의 두 얼굴

○경제 ‘뇌관’으로 부상한 CP

서울지방법원은 지난 13일 여든을 앞둔 고령의 구자원 LIG그룹 회장(78)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경영권 유지를 위해 사기성 CP를 발행했다는 게 재판부 판단이다. 구 회장 등이 LIG건설의 부도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고도 2010년 말부터 이듬해 3월 법정관리 신청 전까지 2151억원의 CP를 발행했다고 본 것이다.

CP로 인한 수난 대열에는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도 들어 있다. 작년 7월 그룹 지주사인 웅진홀딩스가 신용등급이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이를 은폐하고 1200억원가량의 CP를 발행한 혐의로 검찰조사를 받고 있다.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동양그룹은 지난 26일에도 계열사 동양레저와 동양인터내셔널이 각각 74억원, 101억원어치 CP를 발행해 만기가 돌아온 CP를 갚았다. 연말까지 적게는 하루 수십억원, 많게는 수백억원씩 만기가 돌아오는 CP를 갚아야 부도를 피할 수 있다.

CP는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기업뿐만 아니라 그 CP에 투자한 일반인들도 수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동양 계열사가 발행한 4560억원 규모의 CP를 산 개인투자자들은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떨고 있다. LIG건설 CP에 투자했던 800여 개인들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모든 과정은 금융 당국의 감시 체제 밖에서 벌어졌다.

○감시 허술해 ‘현금 도깨비 방망이’ 역할

CP 실제 모습
CP 실제 모습
금융 당국의 감시를 벗어난 ‘불량’ CP 발행은 상법상 약속 어음이며 동시에 자본시장법상 증권인 CP의 이중적 지위로 인해 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1972년 단기금융업법 제정으로 국내에 처음 등장한 CP는 어음법에 기초해 발행되는 특성상 유가증권인 주식이나 채권과 달리 공시의무가 면제된다. 이사회 결의가 필요없고 발행한도 제한도 없다.

느슨한 규제로 인한 편의성은 폭발적인 발행 증가의 원동력이 됐다. 돈이 필요한 기업은 거래 은행에서 어음용지를 받아 작성한 뒤 오전 중 증권사에 넘기면 당일 오후 2시(어음교환차액결제 시간) 이후 현금을 지급받는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CP 발행잔액(ABCP 포함)은 2003년 말 15조8000억원에서 지난 26일 현재 10배에 가까운 144조5000억원 규모로 늘어났다. 한 증권사 어음할인 담당자는 “수요는 늘 풍부하다”며 “어음용지만 가져오면 약정없이 몇 시간 안에 수백~수천억원 할인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한계 기업의 ‘모르핀’ 된 CP

언제든 쉽게 현금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은 한계 기업에까지 유동성 위기 불감증을 키우는 부작용을 낳았다. 완전자본잠식 상태인 동양인터내셔널과 동양레저가 자구노력 없이도 수년 간 정상 경영을 유지한 배경이기도 하다.

문제는 위기가 닥치면 만기 CP를 갚기 위한 차환 발행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점이다. 투자자를 찾기 힘들어진 새 CP의 만기는 더욱 짧아지고, 이자비용은 올라갈 수밖에 없다. 류승화 NH농협증권 투자전략팀 부장은 “위기가 오래가면 초단기 CP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쌓이고, 매일 빚 갚는 데만 몰두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대출이나 회사채 대신 CP를 선택하는 기업들은 이미 재무적인 압박을 느끼기 시작한 이후라는 분석도 있다.

○ABCP의 기형적 성장

규제의 틈새를 파고 들어 차익 챙기는 걸 목적으로 한 파생 CP 상품들은 전혀 새로운 문제를 낳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기업들의 자금조달 수요와 무관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의 폭발적 성장이다.

국내 증권사들은 2000년대 들어 CP의 주요 수요처인 금융권 특정금전신탁(MMT)과 머니마켓펀드(MMF)의 급성장에 대응하기 위해 서류상 회사인 특수목적회사(SPC)를 만들고 ABCP를 쉴 새 없이 찍어냈다. 특히 2009년 자본시장법 시행에 따른 CP 만기 제한(1년 미만) 철폐는 정기예금과 신용부도스와프(CDS) 등 다양한 자산을 기초로 한 ABCP 차익거래까지 불을 지폈다. 결국 2010년부터 ABCP 발행잔액은 일반 CP까지 압도하기 시작했다.

실체 파악이 어려운 ABCP 시장의 급성장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관련 ABCP 부실화로 촉발된 저축은행 사태와 같이 언제든 금융시장 안정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태호/하헌형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