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장기불황에서 배운다 (2부) 박근혜 정부의 과제
(2) 포퓰리즘 경계하라

日 재정악화의 주범 '사무라이 포퓰리즘'

日, 장밋빛 공약 남발…국가부채 GDP의 200% 넘어
대중영합 정치에 길들여진 국민, 고통분담 외면

韓, 朴 당선인 복지예산 135조…정부부처 벌써 걱정
저축률 낮고 고령화 빨라 불황 견딜 내성도 약해
[한경 특별기획] '사탕발림'에 중독되면 나라 곳간은 거덜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그의 소설 ‘설국(雪國)’은 이렇게 시작한다.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된 지역은 일본 니가타현. 산 많고, 눈 많은 외진 곳이다.

1970년대 석유 위기가 터진 뒤 일본 경기가 하향곡선을 그릴 무렵, 니가타 출신 정치인인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가 화끈한 슬로건을 하나 내걸었다.

“이제 도쿄에서 니가타로 돈 벌러 가는 시대가 온다.” ‘국토 균형 발전’이라는 깃발에 일본 전역이 흥분했다. 다나카는 여기에 ‘일본 열도 개조론’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고, 대대적인 토건 사업에 나섰다. ‘사무라이 포퓰리즘’이라고 불리는 일본판 대중영합 정치의 시작이었다.

다나카의 전술은 그 이후에도 고이즈미 준이치로 등 자유민주당 후배 정치인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됐다. ‘자민당 타도’를 외치며 2009년 집권한 민주당도 ‘다나카의 유령’에는 굴복했다. 종말은 늘 파국이었다. 선거 때마다 나온 장밋빛 공약은 어김없이 ‘재정 악화’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일본은 그렇게 ‘잃어버린 20년’의 역사를 썼다.

‘민주주의의 급소’로 불리는 포퓰리즘은 이미 현해탄을 건너 한반도에 상륙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도 양 진영 모두 포퓰리즘의 유혹에 휘말렸다. 한국의 새로운 5년을 설계하느라 분주한 요즘. 사정은 20년 전 일본보다 열악하다. 쌓아 놓은 부(富)도 적고, 고령화의 속도는 일본보다 빠르다. 국중호 요코하마시립대 교수(재정학)는 “포퓰리즘으로 인한 재정 건전성 악화는 한국 경제를 장기 불황으로 빠뜨릴 가장 큰 위협 요인”이라고 우려했다.

[한경 특별기획] '사탕발림'에 중독되면 나라 곳간은 거덜난다


○포퓰리즘에 중독되다

다나카의 ‘토건주의’는 고향에 좀 더 많은 예산을 배정받으려는 지역 정치인과 세금을 집행하는 관료, 공공건설 수주를 따내려는 건설업체 간에 강력한 ‘이권 트라이앵글’을 형성했다. 나라 곳간이 비어 간다는 우려가 나왔지만 국민들은 외면했다. 마을에 다리가 놓이고, 도로가 생긴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포퓰리즘의 맛에 길들여진 것이다. 인구 1000명당 일본의 도로 길이(9.4㎞)가 한국(2.1㎞)의 네 배를 훌쩍 넘는 이유다.

한동안 부작용은 가시화하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 일본 경제가 유례 없는 고도성장을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거품이 꺼지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불거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재정 건전화와 경기 회복이라는 두 가지 숙제를 동시에 안았다. 그러나 매번 대규모 재정 지출과 감세라는 손쉬운 길만 택했다. 고통을 수반하는 세원(稅源) 확대에는 애써 눈을 감았다. “경기가 좋아지면 세수(稅收)가 늘어나 자연스럽게 적자를 메울 수 있다”는 기대에만 매달렸다.

잠복했던 환부는 결국 모습을 드러냈다. 1991년까지만 해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1%를 밑돌던 재정적자 비율이 1994년 5%를 넘어섰고, 2000년대 들어서는 10%대로 올라섰다. 빚을 내서 적자를 메우다 보니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1991년 66.5%에서 작년에는 240% 수준으로 급등했다.

○여전히 똑같은 ‘레퍼토리’

2009년 8월 총선에 나선 민주당은 공약으로 ‘복지 종합선물세트’를 제시했다. 중학생까지 모든 자녀에게 1인당 매달 2만6000엔(약 31만2000원)씩 수당 지급, 공립고등학교 전면 무상화, 월 7만엔의 최저보장연금 신설 등 각종 복지 대책이 공약집을 빼곡히 채웠다.

복지 공약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은 16조8000억엔(약 200조원). 2009년 당시 총 예산의 8%, GDP의 3.4%에 달하는 규모였다. 재원 확보 방안은 늘 그렇듯 예산 낭비 척결과 공무원 인건비 절감 등 국민의 부담과는 직접적으로 상관 없는 내용 일색이었다.

현실의 벽은 높았다. 집권 1년차에 3조3000억엔, 2년차에는 6000억엔의 재원을 마련하는 데 그쳤다. 선거 공약의 대부분은 곧바로 휴지조각이 됐다. 노다 요시히코 전 총리가 작년 선거를 앞두고 “정권을 잡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방만함과 정권 운영의 냉엄한 현실을 모르는 미숙함이 있었다”며 부랴부랴 반성문을 써냈지만, 버스는 떠난 뒤였다.

‘어부지리’로 압승한 자민당 역시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다. 경제를 살리겠다며 20조엔에 달하는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내놓으면서도 전임 민주당 정권이 어렵사리 일궈낸 소비세 인상안은 오히려 연기하려는 분위기다.

○자꾸만 닮아가는 한국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총선 공약으로 제시한 복지정책에 필요한 돈은 어림잡아 총 135조원에 이른다. 정부 씀씀이를 줄이고, 각종 세금 감면 제도를 손질해 충당한다는 방침이다. 정부 부처들은 벌써부터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한 해 예산의 40%에 가까운 재원 대책을 갑자기 마련하긴 어렵다. 그렇다고 집권하자마자 공약을 물릴 수도 없다. 일본판 포퓰리즘의 덫에 이미 발을 들이민 것이다.

한국은 일본보다 포퓰리즘에 견딜 내성(耐性)도 약하다. 일본 개인의 금융자산 규모는 작년 말 기준으로 1500조엔(약 1경8000조원)에 달한다. 독일에 비해 두 배, 프랑스보다는 세 배 정도 많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전 세계 개인 금융자산(약 9800조엔) 중 일본 국민의 자산이 15% 정도를 차지한다. 일본이 재정 악화에 신음하면서도 국채 발행을 지속하고, 신용등급이 떨어져도 외환위기가 오지 않는 이유다.

한국은 복지예산 확대의 주범인 고령화 속도도 일본보다 훨씬 빠르다. 한국은 65세 이상 인구가 7%(고령화사회·2000년)에서 14%(고령사회·2018년)로 넘어가는 데 18년이 걸릴 전망이다. 일본이 보유한 세계 최단기록(24년)을 갈아치울 태세다. 이우광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자문위원은 “일본은 20년을 잃어버리고도 아직 버티고 있지만, 한국은 3년이면 거덜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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