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오일뱅크 2대주주(지분율 21.1%)인 현대중공업과 최대주주(70%)인 아랍에미리트(UAE) IPIC(국영석유투자회사) 측이 현대오일뱅크 경영권을 놓고 2년 넘게 벌여온 법적 분쟁이 사실상 마무리됐다. 이에 따라 현대중공업 등 범(汎) 현대가(家)는 근 11년 만에 현대오일뱅크를 되찾게 될 전망이다.

◆현대가-IPIC,11년 악연 청산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20부(부장판사 장재윤)는 9일 "IPIC 측은 국제중재재판소(ICC)가 2009년 11월 보유주식 전량(70%)을 현대 측에 양도하라고 한 판정을 이행하라"고 판결했다. 현대 측의 가집행도 허가했다. 지난해 현대중공업이 싱가포르 ICC로부터 얻어낸 승소 판결 내용을 국내 법원이 인정해준 것이다. 당시 ICC는 "IPIC 측이 2003년 현대중공업과 체결한 주주간 계약을 중대하게 위반했기 때문에 보유 주식 전량을 현대 측에 시장가격보다 25%가량 싸게 팔라"고 판결했다.

범 현대가와 IPIC의 질긴 인연은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오일뱅크(당시 현대정유)는 1999년 수익성 악화로 부채가 급증하자 IPIC 측에 신주 발행 방식으로 지분 50%를 5억달러에 넘겼다. IPIC는 2003년 지분 20%에 대한 콜옵션 및 2억달러에 달하는 우선배당권도 챙겼다. 2006년엔 콜옵션을 행사하면서 현대중공업이 갖고 있던 현대오일뱅크 지분 20%를 추가로 넘겨 받아 지분율을 70%로 끌어올렸다. 당시 IPIC 현대중공업 현대오일뱅크 등은 IPIC 측의 누적배당금이 2억달러를 넘기 전까지 다른 주주들은 배당을 받지 않고 경영 참여도 포기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대신 누적배당금이 2억달러를 넘어서면 현대 측이 다시 경영에 참여하고 배당도 받는 동시에 어느 한쪽이 계약을 어기면 상대에게 싼 가격에 모든 지분을 파는 강제매각권 조항도 뒀다.

현대오일뱅크는 2007년 전년 회계연도 기준 순이익의 20%만 배당하고 당해 회계연도에 대해서는 배당을 하지 않기로 결정,IPIC의 누적배당금은 1억8800만달러에 그쳤다. 그러자 현대중공업 측은 "고의로 배당을 받지 않아 현대의 경영 참여를 방해하고 있다"고 반발,2008년 3월 IPIC와 자회사인 하노칼홀딩스 등을 상대로 ICC에 소송을 제기했다. IPIC 측은 당시 매각주간사인 모건스탠리를 통해 현대오일뱅크 지분 3자 매각까지 은밀히 추진,현대중공업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후 2009년 11월에야 ICC는 현대측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IPIC 측은 "한국 법원으로부터 집행판결을 획득하기 전까지는 ICC 중재판정이 IPIC 측에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다"며 중재판정 이행을 거부했다. 현대중공업은 같은 해 12월 곧바로 서울중앙지법에 중재판정 승인 및 집행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2년 반 만에 IPIC 측 요청대로 한국 법원의 집행판결을 획득한 것이다.

◆현대重,오일뱅크 경영권 확보절차 돌입

현대중공업은 IPIC 측의 항소 여부와 상관없이 이달 중 IPIC 측의 현대오일뱅크 주식 1억7155만7695주(70%)에 대해 주당 1만5000원씩 산정,총 2조5734억원의 매수대금을 지급하는 등 경영권 확보를 위한 절차에 들어갈 예정이다. 지분 인수 과정에서는 범 현대가가 컨소시엄을 구성할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중공업 외에 현대자동차(4.3%) 현대제철(2.2%) 현대산업개발(1.3%) 등 범 현대가 기업들이 지분을 나눠 갖고 있어서다. 2조원대의 인수자금을 대부분 책임져야 하는 현대중공업은 이미 지분 인수를 위해 2조원 안팎의 차입금을 조달하는 방안도 세워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중공업이 현대오일뱅크 경영권을 확보하면,에너지사업 확대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현대오일뱅크는 하루 39만배럴의 원유 정제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전국에 2300여개의 주유소를 확보,국내 경질유 시장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자산 규모가 5조6000억원 정도인 현대오일뱅크를 인수하면 현재 자산규모 8위(공기업 제외)인 현대중공업은 GS그룹을 제치고 재계 7위에 오를 전망이다.

다만 IPIC 측이 항소 여부를 검토하고 있는 만큼 현대중공업이 현대오일뱅크를 최종 인수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다. IPIC 관계자는 "법원 판결문을 신중히 검토한 후 항소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IPIC 측이 현대오일뱅크 주권 인도를 하지 않고 버틸 가능성도 남아 있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IPIC가 주권 인도를 거부할 경우 추가적인 법적 조치에 나설 것이며,IPIC의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도 배상 책임을 물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장창민/이고운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