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월가 금융사들의 무분별한 고위험 투자와 대형화를 막을 새 규제정책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그의 바로 뒤편에는 키 2m의 거구가 우뚝했다. 오바마는 "이번 정책을 장대 같은 분(this tall guy)의 이름을 따서 '볼커 룰'로 정했다"고 소개했다.

폴 볼커 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83)이 돌아왔다. 2008년 11월 오바마 정부의 백악관 경제회생자문위원회(ERAB) 위원장으로 임명된 이후 그는 별 활동이 없는 뒷방 늙은이 신세였다. 금융 · 경제위기를 주도적으로 수습한 주인공은 새까만 후배들인 티모시 가이트너 재무장관과 로렌스 서머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이었다.

이날 오바마 대통령은 '벤치 워머'였던 볼커를 전면에 내세웠다. 가이트너와 서머스가 기존에 내놓은 금융감독 개혁안이 약하다는 듯 '볼커 룰'로 보강한 것이다. 오바마는 "국민들이 더 이상 대마불사의 인질이 되지 않도록 하자는 조치"라면서 "납세자를 보호하고 제2의 금융위기를 막기 위한 상식적인 개혁"이라고 강조했다.


발표문 행간에는 가시들이 돋아 있었다. 금융위기의 주범임을 잊은 채 뻔뻔스럽게 대규모 보너스 잔치를 벌이는 금융사들에 가하는 초강력 철퇴라고 직접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다. 월가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로비스트 스콧 탈보트는 "이런 규제책이 나올 줄은 전혀 몰랐다"고 혀를 내둘렀다.

볼커의 정책은 기회를 포착하면 거구를 이용해 단숨에 밀어붙이는 프로 레슬러를 닮았다. 그는 금융위기 이후 줄곧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사이에 칸막이를 다시 치고 부실한 대형 은행을 파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해왔지만 주목받진 못했다. 손실은 국민들이 떠안고 고수익은 은행가들이 챙긴다는 시각을 가진 그가 이번에 오바마 대통령을 오히려 전면에 내세웠는지도 모른다.

사이먼 존슨 MIT대 경제학 교수는 "볼커는 정문에서 환영받기보다 뒤로 돌아가 정책의 흐름을 바꿔놓는 스타일"이라고 평가했다. 볼커가 1979년부터 1987년까지 FRB 의장을 지내면서 보여준 정책이 그랬다. 그는 1981년 13.5%에 이르던 살인적인 인플레율을 1983년 3.2%로 진압했다. FRB 의장으로 취임할 당시 11.2%였던 기준금리를 1981년 20%로 과감하게 끌어올린 게 무기였다.

그 후유증으로 기업들이 파산하면서 실업률이 10%로 치솟았다. 고금리에 격분한 농민들과 건축업자들은 FRB 건물 앞에서 연일 시위를 벌였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볼커는 호신용 권총을 지니고 다닌 것으로 알려졌을 정도다. 하지만 그가 인플레를 잡아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호황을 누리도록 토대를 놓은 공적은 FRB의 전설로 통한다.

볼커는 또 영원한 규제주의자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경제학 교수는 "볼커는 인플레를 통제한 것으로 유명하나 레이건 정부에서 불충분한 탈규제주의자로 찍혀 해임됐다"고 전했다. '볼커 룰'이 의회를 통과해 시행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미국 언론들은 볼커의 등장으로 가이트너 재무장관의 입지가 흔들린다거나,가이트너가 볼커의 정책에 불만이 많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워싱턴=김홍열 특파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