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냉키도 그린스펀처럼 롱런할 수 있을까'

최근 30여년간 미국의 중앙은행 총재는 3명에 불과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1명의 평균 재임기간이 10년이 넘는 셈이지만 벤 버냉키 의장의 전임자인 앨런 그린스펀이 무려 19년간 미국 경제를 호령한 탓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5일 버냉키 의장에 대해 4년 임기를 추가로 보장하는 재지명 방침을 발표함에 따라 앞으로 버냉키가 그린스펀처럼 장기 재임체제를 구축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2006년 첫 임기를 시작한 버냉키는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를 예방하지 못했다는 따가운 비판을 받으면서 중도 낙마 가능성도 점쳐졌으나 위기 발발 후 제로금리 정책과 무제한의 통화공급 조치로 금융위기 수습에 성과를 거둠으로써 일단 재지명을 받는데 성공했다.

버냉키가 상원의 인준을 받으면 8년간 재임이 가능하며, 미국 경제가 순조롭게 흘러간다면 10년 이상의 롱런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

버냉키가 롱런하기 위해서는 미국 경제와 시장 상황이 중요하다.

오바마가 버냉키의 재지명을 발표한 25일 미국의 증시는 상승세로 끝나 시장의 평가는 일단 우호적인 것으로 판가름났다.

그러나 버냉키 의장의 앞에 산적한 난제들을 생각하면 그의 장기재임을 낙관하기 어려운 측면도 없지 않다.

버냉키는 지난해 금융위기 발발 이후 정책금리를 제로 수준까지 떨어뜨려 놓은데다 금융사들에 대한 직접지원 방식 등으로 1조달러가 넘는 돈을 시중에 풀어놓은 상태여서 뒷수습 작업이 간단치 않다.

중앙은행의 입장에서 금리를 낮추기는 쉬워도 올리는 것은 몇배로 어려운 법이다.

또 금리를 인상하는 타이밍을 절묘하게 잡아내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도하게 풀린 유동성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 때문에 경기흐름에 충격을 주지 않고 적절히 흡수하는 것도 버냉키의 어깨에 지워진 짐이다.

오랜 경기침체를 마감하고 미국 경제가 회복세에 접어드는 신호가 나타나고 있지만 이번 경기회복은 단기에 그치고 다시 침체에 빠지는 `W'자 형의 더블딥 양상을 보일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어서 버냉키의 앞날은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9.4%를 나타내고 있는 실업률은 곧 10%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돼 통화량 흡수와 정책금리 인상이라는 출구전략을 펴기에는 여건이 극도로 나쁜 상태다.

학문적으로 대공황 발생 원인에 대한 연구에 천착해온 버냉키는 대공황을 다시 초래한 FRB 의장이 결코 되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한 의지를 과시했지만 두자릿수를 위협하는 실업률과 천문학적인 재정적자, 통화정책의 운신의 폭이 극도로 좁아진 여건 등을 감안할 때 제2의 위기를 겪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전임자들과 비교해 버냉키 의장은 시장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약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폴 볼커 의장은 무지막지할 정도의 뚝심으로 긴축정책을 펼침으로써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에서 승리, 80년대 후반 이후 고성장의 토대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린스펀의 경우 경제대통령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강력한 카리스마로 시장을 압도한 인물이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그린스펀의장 재임시절, 그린스펀 없는 미국 경제를 생각할 수 없다며 "만일 그린스펀이 숨진다면 대통령이 그의 얼굴에 선글라스를 씌워 살아있는 것처럼 위장해야 할 것"이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런 전임자들에 비해 버냉키는 학자적인 풍모가 강해 시장을 강력하게 리드하는데는 다소 미흡한 느낌이다.

버냉키 스스로도 이런 면을 의식한 듯, 최근 언론에 빈번하게 등장하면서 시장과의 적극적인 교감을 시도해 눈길을 끌었다.

CBS방송의 시사프로그램인 `60분'에 출연해 자신의 고향집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가 하면 PBS의 유명 앵커인 짐 레러의 사회로 타운홀미팅 형식으로 방청객들과 대화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버냉키의 이런 행보를 두고 그린스펀과 같은 장기재임 체제를 갈망하는 속내를 드러냈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일각에서는 FRB의장의 장기재임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없지 않다.

통화정책에 관한 의사결정이 비밀스럽게 이뤄지는 FRB 조직내에서 의장이 오랜 기간 집권하다보니 금융시장은 물론 미국 경제 전반에 마치 제왕처럼 군림한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그러나 금융시장에 미치는 FRB의장이 파워가 워낙 커진 탓에 FRB의장을 단기간에 교체하는 것은 시장의 안정을 해치는 극히 위험스러운 조치로 여겨지고 있으며, 따라서 FRB 의장의 장기재임이 오히려 당연시되는 풍토다.

이러한 분위기는 버냉키의 롱런 전략에 유리한 요소다.

(워싱턴연합뉴스) 박상현 특파원 shpar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