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은 지난 5월15일 부산 용호시장 인근에 매장면적 1815㎡(550평) 규모의 기업형 슈퍼마켓(SSM) 하나로마트 용호점을 열었다. 하지만 개점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점포가 용호시장과 불과 300m 떨어져 있어 시장 상인들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이다. 농협은 부산 남구청의 중재로 상인들과 협상을 벌였다. 6차례의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은 끝에 양측은 농수산물 매장 축소(최대 660㎡),할인 · 기획행사 판촉물 배포 월 15일 이내 제한,영업시간 조정 등에 합의했다. 농협 관계자는 "정상적인 영업이 가능한 선에서 타협이 이뤄졌고 상인들도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양보하는 자세를 보였다"고 말했다.

SSM을 둘러싼 갈등이 해결 실마리를 찾지 못하며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하나로마트 용호점과 용호시장의 자율조정 사례가 주목받고 있다. 이의준 중소기업청 소상공인정책국장은 "하나로마트가 시장경제 논리만 앞세우고,상인들이 '무조건 출점 반대'를 고집했다면 타결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용호점 사례는 SSM 문제를 해결하는 데 참조할 만한 상생 모델"이라고 말했다.

학계와 전문가 사이에서는 대형 유통업체들이 SSM사업을 시장경쟁과 소비자 이익의 논리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SSM업계 내부에서도 "유통업체들이 상권을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출점하고 과도한 마케팅을 벌이며 중소 상인들을 불필요하게 자극해 갈등을 키웠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대형 유통업체들이 결자해지 차원에서 스스로 나서 상생방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정희 한국유통학회 회장(중앙대 교수)은 "대형 유통업체들이 시장논리뿐 아니라 지역정서나 자영업 현실,사회적 다양성 등도 고려해 SSM 문제를 풀어야 한다"며 "업체들이 모여 자율적인 상생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공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생 가이드라인에는 △비활성화된 상권 우선 출점 △불공정한 출점 행위와 과도한 판촉 자제 △심야영업 제한 등 중소 상인들과 지자체가 납득할 만한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SSM들은 현재 체인스토어협회를 중심으로 대책을 논의 중이지만 뾰족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다. 한 SSM업체 관계자는 "각 업체의 시장점유율과 사업방식이 다른 상황에서 실무자들이 만나 논의해봤자 한계가 있다"며 "CEO(최고경영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도 SSM 출점을 인위적으로 규제해 경쟁을 제한하기보다는 업계 간 자율적인 상생 가이드라인을 내도록 적극 중재하고 공정한 경쟁환경을 조성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김종호 지식경제부 유통물류과장은 "SSM의 출점 속도를 늦추면서 중소 상인들의 경쟁력을 높여 SSM과 독립형 슈퍼들이 경쟁하며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