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가 최악의 위기에서 벗어나자마자 인플레이션(Inflation)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 인플레는 물가가 오르는 현상을 말한다. 단순히 특정 물가가 일시적으로 오르는 게 아니라 전반적인 물가수준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것을 가리킨다.

인플레 조짐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국제유가는 올해 최저점 대비 90%이상 치솟았다. 옥수수 귀리 등 곡물가격도 올 들어 50% 이상 뛰었다. 주식이나 부동산 등 자산가격도 대부분 국가에서 올 들어 큰 폭으로 반등했다. 한국에서도 최근 택시요금이 대폭 인상됐다.

일각에선 이 같은 물가 상승의 흐름이 달러가치 하락과 맞물려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으로 귀결될 것이며,조만간 또 다른 위기가 닥칠 것이란 경고를 내놓고 있다. 하지만 다른 쪽에선 인플레를 막기 위해 각국 중앙은행이 돈을 회수하면 경제가 반등을 이어가지 못하고 긴 침체에 빠질 것이기 때문에 경기부양이 우선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위기 극복 위해 돈 푼 것이 발단

'인플레가 생긴다'는 것은 '돈값이 떨어진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인플레 우려는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각국 중앙은행과 정부가 돈을 대거 푼 데서 기인한다. 실제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지난해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 이후 금융회사에 대한 유동성 공급,국채 매입 등을 통해 1조3000억달러의 돈을 방출했다.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도 올해 1조80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작년의 4배에 이르는 규모다.

영국 유로존 일본 중국 등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부가 재정을 투입하고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시중에 공급해왔다. 각국 중앙은행과 정부가 리먼 사태 이후 금융권 구제금융과 유동성 확충,경기부양을 위해 공급했거나 공급하기로 한 돈은 12조달러에 이른다.

◆"짐바브웨 꼴 난다" 경고도

각국 중앙은행은 작동이 멈춘 금융시스템을 다시 돌리기 위해 돈을 푸는 동시에 기준금리(정책금리)도 대폭 내렸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 기준금리가 사실상 '제로(0)'이며 잉글랜드은행과 유럽중앙은행(ECB)도 기준금리를 각각 연 0.5%와 연 1.0%로 인하했다. 사상 초유의 저금리가 전 세계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금융회사 간 자금거래가 재개되고 신용위험이 크게 줄었다.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다.

하지만 돈이 넘치는 데다 초저금리 상태가 지속되면서 주식 부동산 등 자산과 원유 구리 금 등 원자재가격이 뛰기 시작했다. 지난 3월1일과 비교해 지난달 29일까지 영국 미국 중국 프랑스 일본 등 주요국 주가는 20~30% 상승했다. 국제원유의 기준 역할을 하는 미국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는 배럴당 70달러를 눈앞에 두고 있으며 연초 대비 60% 이상 치솟았다.

또 하나 주목할 현상은 달러가치의 급락이다. 미국이 다른 국가에 비해 찍어낸 화폐(달러)가 많고 재정적자 규모가 크다 보니 달러가치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실제 최근 두 달 새 달러가치는 유로화에 비해 12.7%나 하락했다.

달러화의 폭락은 인플레를 가속화할 것이란 우려가 많다. 아직까지는 달러가 기축통화이다 보니 달러 기준으로 거래되는 원자재 곡물 등 대부분의 상품 가격이 더 치솟을 것이란 얘기다.

미국 월가의 대표적 비관론자인 마크 파버는 "FRB가 금리 인상을 꺼리고 있어 미국의 물가가 짐바브웨처럼 올라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짐바브웨는 지난해 7월 한 달간 물가상승률이 2억3100만%에 이른 바 있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고 국민들의 실제 소득은 그만큼 증가하지 못하면 생활수준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하이퍼인플레까지는 아니더라도 미국의 인플레율이 8~10%에 이를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위기 전 미국의 물가상승률이나 잠재 경제성장률이 1.5~2%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정도는 엄청난 것이다. 미국의 블랙스완 같은 일부 헤지펀드들은 달러를 버리고 원자재나 곡물을 매입함으로써 인플레에 베팅하는 전략까지 취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FRB와 잉글랜드은행을 겨냥,"중앙은행들이 돈풀기 정책을 되돌리지 않으면 10년 내 또 다른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디플레가 더 걱정" 목소리도

토머스 사전트 미국 뉴욕대 교수는 "지금 세계는 인플레와 디플레(경기침체)의 가능성이 공존한다"고 진단했다. 돈을 푼 것 때문에 인플레 우려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돈을 풀지 않았다거나 돈을 거둬들이면 경기침체의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얘기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미국에서 인플레 위협은 없으며 오히려 디플레가 더 걱정"이라며 인플레 우려를 일축한다. 그는 현재 미국의 소비자물가는 1년 전에 비해서도 낮은 수준이고 임금 상승세도 높은 실업률 앞에서 주춤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지금은 여전히 위기국면이어서 FRB가 자금을 방출해도 은행들이 기업 등에 자금을 대출해 주지 않고 오히려 FRB에 예치하는 상황이어서 평상시와 달리 자금을 더 푼 효과가 없다고 지적했다.

인플레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불가피론'도 만만치 않다. '맨큐의 경제학'저자로 유명한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는 부채에 시달리는 미국 가계와 공공재정에 숨통을 열어주고 소비자들이 지출에 나서도록 자극하기 위해서는 인플레에 대해 '조금 느슨한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플레를 조장함으로써 실질금리를 마이너스로 떨어뜨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는 아예 "가계 부채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몇 년 동안 물가상승률이 6% 정도 유지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권하기도 한다.

이 같은 인플레 논쟁에 대해 각국 중앙은행과 정부는 아직 관망 자세를 취하고 있다. 유동성 확대와 저금리 기조를 유지한 채 경제가 흘러가는 양상을 지켜본 뒤 인플레가 실제 문제가 되는지를 보고 대처하겠다는 것이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