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가 하락하면 투자가 증가하고 소비도 늘어난다는게 경제학 원론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래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대표적인 금융정책 가운데 하나가 금리를 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미 이같은 금리정책이 효과를 잃은지 오래됐고 최근에는 미국에서조차 수차례에 걸친 금리인하에도 불구하고 경기회복 조짐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금리조정을 통한 금융정책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되면 경제가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졌다고 한다. 금리가 하락하면 가장 민감하게 영향받는 것이 투자다. 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투자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가름하는 기준은 금리다. 투자를 해도 금리만큼 돈을 벌지 못한다고 판단하게 되면 투자를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금리가 낮아지면 투자를 늘릴 것이고 금리가 올라가면 투자를 덜 하게 된다. 그러나 금리가 워낙 낮으면 금리는 그다지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지 않는다. 다른 경제여건, 예를 들어 앞으로의 경기전망 등이 투자를 결정하는데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따라서 금리를 낮추더라도 투자는 이에 반응하지 않는다. 소비도 마찬가지다. 보통 금리가 높아지면 사람들은 현재의 소비를 다음 시기로 늦추는 것이, 금리가 낮으면 현재의 소비지출을 늘리는게 현명할 것이다. 말하자면 소비의 시기를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하는 기간간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금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금리가 아주 낮아지게 되면 기간간 소비의 선택에 있어서 금리의 역할이 현저히 감소한다. 금리가 하락해도 미래에 대한 불안심리 때문에 사람들은 현재의 소비를 늘리기보다 저축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금리가 낮아져도 가계에서 소비지출을 늘리지 않고 기업들이 투자지출을 늘리지 않으면 유동성함정에 빠지게 되고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의 여지는 그만큼 좁아지게 된다. 최근 일본의 경우가 이같은 유동성함정의 전형적 예로 거론되고 있다. 금융회사는 부실채권 때문에 빌려줄 돈이 충분치 않고, 기업은 초과 설비로 새로운 투자에 대한 유인이 없고, 소비자들은 불안한 미래 때문에 쉽사리 지출을 늘리지 않고 있다. 명목금리조차도 거의 0%에 가까운 수준임에도 이같은 상황에서의 장기불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무한정한 통화 증발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유도하고 실질금리를 0% 이하로 끌어내릴 것을 권하기도 했다. 아직 단언할 수 없지만 우리의 경우도 장기 불황의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유동성 함정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정부측에서는 이같은 유동성함정의 가능성을 단호하게 부인하고 있지만 그렇게 부인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 한국외대 경제학 교수 tsroh@maincc.hufs.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