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요즘 중소 자영수퍼나 재래시장 상인들에게 이말처럼 실감나는게 없다.

대기업의 공세에 더이상 밀리다가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위기의식이
중소상인들의 집단화와 매장현대화를 통한 활로찾기에 불을 붙이고 있다.

할인점의 등장은 그렇잖아도 백화점이나 현대식 수퍼마켓 등에 대한
피해의식을 느껴왔던 중소상인들을 더욱 주눅들게 만들었다.

E마트 프라이스클럽의 개점이후 유행처럼 번진 가격할인경쟁은 판매
이익율이 12~13%에 불과한 중소 점포의 수지타산을 악화시키고 있다.

"듣기 좋은 말로 영세상인들은 들풀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실상 제살깍아먹기로 연명해온거나 다름없다.

부부가 매달려 하루 13시간 이상씩 뼈가 빠지게 일하지만 정작 남는게
없다.

3~4년간 제조업체가 지원해준 냉장고나 상품진열대로 매장을 꾸며놓은뒤
무자료상품으로 과세특례혜택을 누리다간 과표가 올라갈때 쯤 위장폐업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한 상인의 신랄한 비판은 국내 소매점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중소상인들이 변하고 있다.

공동구매 등 협동화사업을 통한 덩치불리기로 자구책마련에 나서고 있다.

수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 허종기전무는 "중소상인들은 할인점외에도 대기업
의 유통업참여와 시장개방 등에 대해 사실상 무방비상태에 놓여있었다"며
"공동구매를 통해 구매물량을 늘리는등 협동화만이 살 길이라는 인식이 커지
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동남부조합 북부조합 등 일부 지역 수퍼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창고형 공동매장의 건립은 이점에서 주목된다.

중소상인들이 공동출자로 공동매장을 만들어 공동구매를 활성화하고 일반
소비자들에게 개방,수익사업으로도 활용하자는 것이다.

한편으론 연합회 차원에서 할인점과 일반 수퍼에의 납품가격차이를 조사,
차이가 있을 경우 제조업체에 이의 시정을 요구하거나 소비자들의 대량구매
가 결국은 과소비와 부대비용 지출을 유발한다는 논리를 적극적으로 홍보할
계획이다.

일부 점포를 중심으로 매장의 재단장과 포스시스템,슬러쉬기기의 도입등
수퍼의 편의점화도 시도되고 있다.

업계관계자들은 미국에서도 소매점들이 할인점의 도전을 받자 24시간
영업체제를 가동하거나 1차식품에 대한 전화주문 배달서비스 등을 실시,
지역밀착형 편의수퍼로 전환된 사례를 지적한다.

재래시장의 상인들도 현대화된 집단상가의 건축이나 공동브랜드개발등
공동화 협업화로 할인점의 파고를 넘을 계획이다.

의류가 주종인 남대문시장의 경우 노바 빅벨 빅게이트 등이 공동브랜드를
내놓았고 최근엔 동대문시장에서도 통일상가가 덴폴이라는 공동브랜드를
선보였다.

남대문시장이 본동상가를 신상가로 탈바꿈시키고 지하에 대규모 주차장을
유치한다는 목표로 지주와 건물주의 동의를 받는 등 시장재건축도 추진되고
있다.

1차식품이나 생필품이 주종인 재래시장들도 집단상가의 건축을 추진하고
있지만 장기적으론 선진국처럼 수퍼마켓 등에 시장의 고유기능을 빼앗기지
않을까 우려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중소상인들은 궁극적으로 제조업이 유통업을 지배하는 시장구조
자체가 변해야한다고 입을 모은다.

"백화점이나 대형 수퍼마켓은 제조업체와 직거래를 하지만 중소상인들은
대리점을 통해서 물건을 받고 있다.

중소상인들이 대형업체와 똑같은 방식으로 대량구매하겠다고 해도 제조업체
가 응해주지 않는다.

우리에게도 똑같은 거래방식을 적용하면 자사물량의 80%를 차지하는 대리점
조직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허종기 전무의 울분에 찬 지적은 국내
유통구조의 근본적인 재편없이는 진정한 가격혁명이란 이뤄질수 없음을 보여
준다.

< 이영훈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