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상과학소설(SF) 거장 로버트 하인라인은 1961년 작 <낯선 땅 이방인>에서 그록(grok)이라는 묘한 단어를 세상에 내놨다. 화성에서 자라 지구로 온 주인공이 사용하는 이 단어는 ‘이해하다(understand)’라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심오한 의미로 묘사됐다. 머리로만 아는 게 아니라 몸과 감각이 일체화돼 ‘체득’하고, 상대의 본질을 깊숙이 꿰뚫어 하나가 되는 상태. 그것이 그록의 본뜻이다.
이 단어는 소설 출간 후 초기 실리콘밸리 해커와 히피 사이에 들불처럼 번졌다. 복잡한 코드 논리를 완벽하게 이해했거나 새로운 철학적 진리를 깨달았을 때 그들은 “그록했다”고 외쳤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화성어는 인공지능(AI) 시대의 최전선에서 다시 소환됐다. 일론 머스크의 AI 챗봇 그록(Grok)과 엔비디아가 지난해 인수한 추론용 AI 반도체 스타트업 그록(Groq)이 그 주인공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삼성전자가 우리를 위해 그록3 언어처리장치(LPU) 칩을 제조하고 있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머스크와 엔비디아는 AI가 단순한 데이터 처리를 넘어 인간의 의도와 맥락을 ‘완벽히 파악’하고 해법을 내놓길 바라는 염원을 그록이란 단어에 투영했다. 단순한 ‘확률적 언어 생성’을 넘어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믿었던 ‘통찰’의 문턱을 넘보겠다는 선언이다.
기술 진보가 곧바로 그록의 완성으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하인라인의 소설에서 그록은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공감과 유대를 전제로 한다. 정보는 넘쳐나되 타인의 고통에는 무감각해지는 ‘비공감의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그록’해야 할 대상은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다음 단어가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데이터를 삼켜 지식을 뱉어내는 AI의 속도는 경이롭다. 하지만 그것이 대상과 하나가 되는 그록의 경지에 닿았는지는 의문이다. 진정한 이해란 결국 차가운 연산이 아니라 뜨거운 공명에서 시작된다. 초지능의 시대가 다가올수록 역설적으로 이 화성어의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