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환자 생명은 뒷전인 '탈모약 급여'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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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질환자에 쓸 돈도 부족
건보 재정은 '화수분' 아냐
오현아 바이오헬스부 기자
건보 재정은 '화수분' 아냐
오현아 바이오헬스부 기자
최근 한 전문의는 기자와 만나 이렇게 반문했다. “탈모약 급여화를 정말 추진할지는 몰랐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16일 보건복지부 업무보고 당시 탈모 치료제의 건강보험 급여 적용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당시만 해도 의료계에서는 “정치적 메시지에 가깝다”며 실제 추진할 가능성은 작게 봤다. 급여 적용의 타당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분위기는 달라지고 있다. 복지부가 탈모약 급여화를 정책 과제로 검토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지난달 29일 유정민 복지부 보험급여과장은 기자들과 만나 “대통령이 지시한 취지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내부 검토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탈모약 급여화는 청년층에 ‘체감할 수 있는 혜택’을 제공하자는 취지에서 논의되고 있다. 청년층이 건보료를 꾸준히 납부하지만 의료 이용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문제는 건보 재정이다. 탈모약을 급여화하면 그만큼 다른 의료 영역에 투입될 자원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건보 재정은 필요하면 돈이 나오는 ‘화수분’이 아니다. 의료계는 수요 급증과 장기 복용 특성을 감안하면 탈모약 급여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본다. 김재연 대한의사협회 법제이사는 “최소 1조원에서 최대 3조6000억원까지 소요될 수 있다”고 관측했다.
물론 이 대통령의 지적처럼 탈모는 삶의 질과 직결된 문제다. 당사자에게 결코 가벼운 고통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를 ‘생명’의 문제와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의료 현장에는 치료제가 있는데도 급여 적용이 되지 않아 약을 쓰지 못하고 고통받는 중증질환자가 적지 않다. 심장·뇌·혈관 수술 등 환자의 생명과 직결된 영역에서는 치료재료 공급이 불안정해 의료진과 환자 모두 불안을 호소하고 있다. 정부가 “재정이 한정돼 있다”는 이유로 비용을 조여온 결과다. 한 의료기기 업체 관계자는 “원·달러 환율 급등에 따른 원자재값 상승으로 치료재료 공급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며 “이 같은 현실에도 정부가 탈모약 급여 논의를 우선순위에 두는 듯해 허탈감이 든다”고 토로했다.
고령화와 저출생으로 건강보험 재정에는 이미 빨간불이 켜졌다. 건보 재정이 부담한 국민 병원비와 약값은 지난해 처음 100조원을 돌파한 것으로 추산된다. 2030년이면 현재 약 30조원 규모인 누적 적립금이 고갈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탈모약 급여에 쓸 돈이 있다면,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데 먼저 써야 할 것이다. 청년 지원이라는 명분 아래 추진하는 포퓰리즘 의료 정책은 지금이라도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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