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e]허세민의 인터미션
10주년 맞은 뮤지컬 '다시, 동물원'
동물원 원년 멤버 박기영 음악감독 인터뷰
동물원 데뷔, 김광석 탈퇴 등 서사 담아
"심리치료 받은 듯 편안하게 과거 마주해"
최애 넘버는 "광석 형이 부른 '거리에서'"
대학로 한복판, 붉은 벽돌의 건물들이 포근히 둘러싼 '청춘의 무대' 마로니에 공원. 뮤지컬과 연극의 중심지인 이곳 일대는 1980~1990년대까지만 해도 '라이브 콘서트의 성지'로 북적였다. 꼭 30년 전인 1995년 8월, 고(故) 김광석의 1000회 공연도 바로 마로니에 공원 옆 학전 소극장(현 아르코꿈밭극장)에서 열렸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사진=허세민 기자
이 역사적인 공간에서 5분 거리도 안 되는 곳에선 지금도 '영원한 가객' 김광석의 노래가 꿈결처럼 흘러나온다. 한때 그가 몸담았던 포크 그룹 '동물원'의 노래가 어우러진 뮤지컬 '다시, 동물원'의 무대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이 작품은 김광석과 함께 동물원의 원년 멤버로 활동한 가수 박기영(60)이 음악감독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는 요즘도 배영길, 유준열과 함께 3인조 동물원으로 무대에 오른다.
박기영 음악감독이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임형택 기자
최근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캠퍼스 인근에서 만난 박 감독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며 30~40년 전 김광석과 함께했던 초창기 동물원 시절 이야기를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렸다. "1986년이었죠. (민중가요 노래패인)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광석 형을 처음 만났어요. 1987년 10월엔 이 근처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광석 형이 '녹두꽃'을 불러 노래운동 진영의 샛별로 떠올랐어요. 당시 전 건반을 맡았고요. 이후 광석 형의 제안으로 음반 녹음에 참여했는데 그게 바로 동물원의 시작이었습니다."
뮤지컬 '다시, 동물원'의 한 장면. 왼쪽부터 박기영, 박경찬, 그 친구(김광석), 유준열, 김창기 역을 맡은 배우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하트앤마인드
뮤지컬 '다시, 동물원'은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김광석과 그의 동물원 친구들 이야기를 담은 실화 기반 작품이다. 동물원이 1·2집을 발매한 1988년 무렵부터 이후 김광석이 동물원을 나와 솔로 활동을 펼치다 199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서른 즈음에', '나무' 등 김광석의 노래와 '혜화동', '변해가네', '널 사랑하겠어' 등 동물원의 수많은 히트곡이 관객들을 추억 여행으로 이끈다. 노래 하나로 뭉쳤던 친구들의 순수한 우정과 현실 앞에서 고뇌하던 청춘의 단상이 노랫말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극 중에선 김광석을 연기하는 '그 친구'를 제외하고, 실제 동물원 원년 멤버인 김창기·박기영·유준열·박경찬의 실명을 그대로 사용해 몰입감을 높인다. 기타와 건반을 직접 연주하는 배우들도 짙은 호소력으로 그때 그 시절 감성을 아련히 불러일으킨다. 박 감독은 "동물원 친구들의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청춘, 우정 등 보편적인 주제를 다뤄 많은 관객들이 공감하는 것 같다"며 "특히 그 시절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젊은 관객들이 호기심을 느끼고 흥미로운 레트로 감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뮤지컬 '다시, 동물원'의 한 장면./사진=하트앤마인드
실화 기반 뮤지컬이지만 극적 효과를 위해 일부 내용은 각색했다. 전업 가수가 되겠다는 김광석과 취업 후 음악 활동을 병행하겠다는 다른 멤버들 사이의 갈등이 실제보다 직접적으로 그려진다. "원래 동물원 멤버들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물론 속으로는 서운한 마음이 있었겠지만, 화를 내기보다 서로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편이었죠. 작품에서처럼 심각하게 대립하진 않았어요." 또 극 중에선 김광석과 김창기가 동창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유준열과 김창기가 고등학교 동창이고 김광석은 유준열의 지인을 통해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박기영 음악감독이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임형택 기자
이번 시즌엔 일부 넘버가 새롭게 추가됐다. '회귀', '동물원' 등의 노래를 빼고 '우리가 세상에 길들기 시작한 후부터',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사랑했지만' 등의 명곡을 새로 선보인다. 특히 2막 말미 '그 친구'가 부르는 '사랑했지만'은 제목 그대로 '사랑'이 아닌 '우정'으로 해석되며 깊은 울림을 준다.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과 같은 가사가 당시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는 부분이에요. '그 친구'의 죽음과 친구들의 추모를 한 곡에 담은, 작품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곡입니다."
동물원은 데뷔 당시 '회색빛 도시의 서정을 노래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애잔한 정서가 배어있는 곡들이 많다. "시간은 흘러가고 꿈은 소리 없이 깨어져"(1집 수록곡 '잊혀지는 것'),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2집 수록곡 '혜화동')" 등의 노랫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슴 깊숙한 곳을 쿡 지르며 여운을 남긴다.
박 감독은 이 같은 동물원 특유의 정서에 대해 "멤버들이 대학 생활을 시작한 80년대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결핍이 있었던 영향이 컸던 것 같다"며 "불안, 그리움 등의 감정이 젊음을 대표하는 정서로 자연스럽게 드러났다"고 돌이켰다.
박기영 음악감독이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임형택 기자
수많은 곡 중 그가 가장 아끼는 동물원 노래는 뭘까. 박 감독은 잠시 고민하다가 동물원 1집에 수록된 '거리에서'(김창기 작사·작곡)를 꼽았다. "'거리에서'는 광석 형이 부른 곡이기도 하고, 다른 1집 수록곡과는 결이 달라요. 다른 노래는 멤버들의 색깔이 도드라지는데, 이 곡은 제작자('산울림'의 김창완)를 생각해 대중이 좋아할 만한 주류 발라드풍으로 전략적으로 넣은 것이에요. 그래서 당시 멤버 중엔 이 곡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 노래에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지금의 동물원과 김광석을 있게 해준 고마운 곡인데, 그동안 너무 외면한 것 같아서요. 이제는 미워했던 만큼 더 아껴주려고요."
뮤지컬 '다시, 동물원'의 한 장면./사진=하트앤마인드
박 감독은 매주 한 번씩 무대 위 배우들의 연주를 보고 피드백을 남긴다. 그때마다 김광석과의 마찰 등 지난날을 떠올려야 해 불편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처음엔 조금 당황스러웠던 게 사실이에요. 당시엔 해소되지 못하고 무의식 속에 쌓인 원망 같은 감정을 바라보게 됐으니까요. 하지만 제 모습을 한 발 떨어져 객관적으로 보고, 친구들의 감정에도 이입해보면서 그때는 미처 몰랐던 감정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마치 심리 치료를 받은 것처럼 이제는 훨씬 편안하게 무대를 볼 수 있어요. 무엇보다, 동물원의 이야기를 계속 써 내려갈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동덕여자대학교 공연예술센터에서 열리는 이번 10주년 공연은 다음 달 14일까지 이어진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서는 관객들이 잊고 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좋겠어요. 그래서 실제로 친구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이 공연은 그걸로 충분히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