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 투어로 만난 워싱턴 D.C. 국립공연예술센터
권력의 소유물 된 예술, 길 잃은 대중의 발걸음
때로는 ‘언제든지 갈 수 있다’는 느긋함이, 오히려 가장 큰 방해꾼이 되기도 한다. ‘케네디 센터’,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공연 예술의 명소. 공연으로 자주 방문하는 곳이지만 센터가 제공하는 투어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미국살이 20년 만에 드디어 실천해 본다.
케네디 센터의 전경 / 출처. L'Observatoire International 홈페이지
역사와 건축을 이해하고, 공연 무대 뒤를 직접 엿볼 수 있는 공연장 투어는 관객으로서의 경험과 폭이 한층 더 넓어지는 특별한 순간이다. 더군다나 ‘모두가 예술을 쉽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설립 취지에 따라, 대부분의 공연장 투어가 유료인 반면 케네디 센터의 투어는 무료로 운영되고 있다. 약 75분간 가이드와 함께 센터의 역사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주 7일 예약도 필요 없이 그저 지하 1층 투어 데스크에서 투어를 요청하기만 하면 된다.
자유, 평등, 행복 추구권 위에 설립된 예술의 무대
1971년 개관한 케네디 센터는 미 의회가 설립한 국가 지정 예술 기관이다. 단순한 공연장 이상의 국가 공공 기관의 의미를 지니며 케네디 대통령 전시관, 밀레니엄 스테이지, 별관 The Reach[1], 식당, 카페, 테라스까지 예술과 삶이 공존하는 이곳은, 누구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나는 종종 지인과의 만남의 장소로 이곳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넉넉한 공간감은 물론 머무는 시간조차 예술의 일부가 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예술 교육 창작 복합 공간 ‘The Reach’ (케네디 센터 별관)의 전경 / 출처. L'Observatoire International 홈페이지
케네디 센터의 투어는 총 5가지가 있다. 그중 내가 선택한 것은 ‘캠퍼스 하이라이트 투어’. 콘서트 홀, 오페라 하우스, 그리고 개관 당시 외교 관계를 맺었던 국가들의 국기가 걸린 Hall of Nations 등 센터의 핵심 공간을 둘러보는 코스이다.
케네디 센터의 심장, 콘서트 홀
콘서트 홀은 센터에서 가장 큰 공연장으로 2,400석 규모를 자랑한다. 주로 오케스트라 연주나 리사이틀 등이 열리며, 조성진과 임윤찬을 비롯한 한국 연주자들도 꾸준히 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늘 관객들로 가득하던 이곳을 단 네 명만이 들어서니, 마치 같은 공간을 다른 차원에서 경험하는 듯한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케네디 센터의 '콘서트 홀' / 사진. 케네디 센터 홈페이지
가이드는 천장의 샹들리에 청소법부터 이스라엘 라운지에 관한 이야기까지, 늘 궁금했던 부분들을 꼼꼼히 설명해 주었다. 샹들리에는 놀랍게도 높이 조절 장치가 있어 청소 시 아래로 내려 닦을 수 있었고, 공연 전 일부 사람들이 모여있어 궁금했던 이스라엘 라운지는 연간 1,800달러 이상 기부한 후원자들이 이용 가능한 공간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웠던 곳은 박스석 중앙에 자리한 ‘대통령의 방(Presidential Box)’이었다. 그 방은 센터가 아닌 백악관이 관리하며 대통령과 백악관의 초청 인사들이 이용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게 그 방 입구에 크게 걸린 트럼프 대통령의 사진을 마주한 순간, 잊고 있었던 지난 2월 트럼프의 ‘셀프 의장 취임식’ 소란이 떠오르며 괜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케네디 센터는 국가 예술 기관인 만큼 대통령이 이사진을 임명하지만, 실권은 행사하지 않는 ‘명예 의장(Honorary Chair)’으로서 문화 예술에 대한 정부의 지지를 상징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런데 2025년 2월, 트럼프는 6년의 임기가 끝난 18명의 이사진을 자신의 측근들로 교체한 후, 케네디 센터 역사상 처음으로 명예 의장이 아닌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의장(Chair)’의 자리에 오른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의장이 되자마자, 센터의 진보적 성향과 이른바 woke[2] 프로그램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드러냈고, 그 과정에서 청소년의 성 정체성과 다양성을 다룬 센터 주최 뮤지컬 <Finn>의 전국 투어가 ‘재정상의 이유’라며 취소되었다. 이에 정치권력이 장악한 예술 공간에 참여할 수 없다며, 뮤지컬 <해밀턴> 제작진도 예정되었던 공연을 취소하며 논란은 점점 커져갔다. 이후 많은 예술가들이 트럼프의 방향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케네디 센터에서의 공연을 취소하거나 출연을 철회했다. 트럼프가 의장으로 ‘셀프 선출’된 후 처음 열린 공식 행사에서의 <레 미제라블> 공연은 일부 출연진의 보이콧으로 대체 배우들이 무대에 오르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그날 트럼프와 멜라니아가 등장하자 울려 퍼진 환호와 야유가 뒤섞인 장면은 많은 매체에 보도되기도 했다.
흔들리는 예술의 터전
워싱턴 D.C.의 대표 예술 단체로서 조성진, 임윤찬, 손열음 등의 공연을 주관한 워싱턴 퍼포밍 아트(Washington Performing Arts)마저 케네디 센터와의 공동 작업을 전면 중단한 상태이다. 현재 케네디 센터의 후원자 기반은 무너지고, 2025-26 시즌 공연 구독률은 전년 대비 36%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극은 82%, 어린이 공연은 84% - 출처: 워싱턴 포스트). 떨어지는 판매율에 케네디 센터는 트럼프의 장악은 잘못되었지만 예술가를 배척하지 말아 주기를 호소하고 있는 상황이다.
멜라니아 트럼프 오페라 하우스?
투어 중 들른 오페라 하우스에서 나의 참담한 마음은 한층 더 무거워졌다. 이 공연장의 명칭을 ‘멜라니아 트럼프 오페라 하우스’로 바꾸자는 수정안이 하원 세출 위원회(House Appropriations Committee)[3] 표결을 통과했고, 나아가 센터의 이름까지 ‘트럼프 센터’로 바꾸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법적으로도 불가능하고 윤리적으로도 부적절하다는 반대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권력에 아첨하는 무리들의 추악한 행태는 도를 넘어서고 있다.
예술은 본래 개인의 취향이 강하게 작용하는 영역이다. 어쩌면 트럼프가 제기한 문제들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한적하다 못해 적적해보이는 ‘The Reach’ 공간의 활용성이나 센터의 일부 프로그램에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술이 특정 정치인의 호불호나 세계관에 따라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한 개인의 기호로 재단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대중의 목소리와 스펙트럼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기호에 따라 모든 ‘불호’가 사라져 버린다면 싫으면 보지 않을 선택권이 박탈되는 것은 물론, 싫어도 봐야 하는 강제성이 부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선택의 대상이지 강요의 대상이 아니다.
[1] The Reach : 2019년 문을 연 케네디 센터 별관. 공연장보다는 교육, 전시, 워크숍, 지역사회 참여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열린 예술 공간이다. [2] Woke : 본래는 인종차별·성차별 등 사회적 불평등에 ‘깨어 있는’ 태도를 뜻했지만 최근에는 미국 보수 진영에서 과도한 진보 성향이나 정치적 올바름을 비꼬는 말로도 쓰인다 [3] 하원 세출 위원회(House Appropriations Committee): 미국 연방 하원의 상임위원회 중 하나로 정부의 예산과 지출을 심사·승인하는 핵심 권한을 가진 위원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