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독자 시점...고구마는 영화에 맡기고, 원작은 사이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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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우상의 상태창
싱숑 작가,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 리뷰
우리가 그 시절 소설 전독시에 열광했던 이유
나만 아는 정보로 '사회적 계급'을 뒤엎는 쾌감
싱숑 작가,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 리뷰
우리가 그 시절 소설 전독시에 열광했던 이유
나만 아는 정보로 '사회적 계급'을 뒤엎는 쾌감
그래도 입이 근질거려 굳이 한마디 하자면, “아 이 조합으론 아무리 줌아웃해도 B■각은 안 나오겠다.”
기대보다 잘 살린 부분도 많은데, 확언컨대 그 둘의 금실은 나빠졌어요. 원작은 뒤집어도 보고 거꾸로도 봐도 노려 쓴 게 분명한데, 영화에서는 글쎄요. 네-. 이게 무슨 얘긴지 도통 모르겠다 싶은 분들은 부디 그 순수함을 잘 간직하십쇼.
옛날 옛적에 호랭이 담배피던 PC통신 시절 대표작이 ‘드래곤 라자’와 ‘퇴마록’이라는 데 크게 반발하는 어르신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출판물 대신 온라인에서 연재하는 소설을 부르는 호칭이 ‘인터넷 소설’을 거쳐 오늘날의 ‘웹소설’이 됐을 때. 웹소설의 대표작으로 전독시를 꼽는 데에 저항감이 큰 분도 흔치는 않을 거고요.
왜냐면 그야 웹소설 이 바닥의 ‘삼신기’. 그러니까 ‘회귀’, ‘빙의’, 그리고 ‘상태창’을 맛깔나게 버무려놓아서, 장르적 기틀을 다지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건 분명하니까요. (엄밀히 빙의물은 아니긴 합니다) 특히 ‘성좌물’이라는 장르가 전독시 성공 이후로 꽤 오랫동안 유행을 했죠.
그럼에도 지금에서야 이런 뒷북 리뷰를 쓰고 있는 건 역시나 소설 원작의 영화가 개봉했기 때문이겠죠?
영화를 보신 분들 중엔 웹소설이나 웹툰을 먼저 본 팬도 많겠지만, 사전 정보 없이 극장에 들어갔다가 ‘어, 재밌는데?’ 싶었던 분들도 계실 거잖아요?
각색된 부분을 꼽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라겠지만, 어쨌든 뒷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웹소설도 함 잡숴보시라고 쓰는 글입니다. 덤으로, 그 시절에 비해 오늘날 웹소설의 문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생각나는 대로 몇 줄 써볼게요.
기다리던 재앙 오셨네
영화로 보니 확실히 알겠습니다. 소설이든 영화든 전독시의 초반부는 불편해요. 폐쇄 공간인 지하철 열차 칸에서 주인공 김독자와 승객에게 대뜸 미션이 떨어지죠. 요약하면, ‘10분 안에 생명체를 죽여. 안 그러면 너님이 사망’. 그 상황에서 힘이 약한 노약자가 최우선 표적이 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겠죠. 그리고 이런 행위를 합리화할 수 있는 핑계도 좋죠. 아니면 죽는 건 나니까. 이 과정에서 도덕과 규칙 등으로 가려져 있던 인간의 민낯이 드러나죠.
영상으로 보니 확실히 텍스트로 볼 때보다 더 끔찍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뭔가 이질감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점점 더 커지죠.
‘김독자가 이렇게 답답한 캐릭터였나? 이렇게 고구마였어?’ 소설에서 김독자는 더 영악한 인물로 묘사됩니다. 재앙이 찾아오기 전 평범한 일상에서 ‘찐따’, ‘계약직 근로자’로 철저히 약자였던 김독자는, 재앙 이후 강자로 각성합니다. 남들한테 ■덕 소리 들으며 혼자 파던 그 소설이, 내가 사는 세상에 오버랩됐다? 줄거리도 나만 알아? 그걸 어떻게 참아요.
그래서 바로 전독시, 아니 웹소설의 흔한 성공 포인트 첫 번째. 현실에서 나는 좀 못 나갔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내가 남들이 무시하는 소설을 봐서, 혹은 망겜을 해서 기존 룰을 뒤집고 최강자가 된다?! 이게 얼마나 맛있게요?
사이다와 인성을 동시에 챙기는 방법
이게 소설 전독시의 초반 플롯입니다. 답답한 전개? 그런 게 있을 리가. 일단 극장에 앉혀두면 어지간해선 2시간은 참고 보는 영화와 웹소설은 성격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전독시가 처음 연재됐던 플랫폼 ‘문피아’는 편당 결제 시스템입니다. 5000자 분량의 한 편을 보고 재미가 없으면 다음 편은 결제 안 하면 그걸로 끝. 따라서 한 편의 말미에는 무조건 ‘컷팅신공’이 들어가야 하고, 그렇게 결제한 다음 편에선 독자가 원하는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먹어봤는데 원하던 맛이 아니다? 그랬다간 댓글창이 꽤나 소란스러워질 겁니다. 이른바 ‘쥐흔’(작가 쥐고 흔들기)이 시작되죠. (이 바닥에서 100원의 가치는 꽤 무겁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딜레마가 하나 생깁니다. 독자들이 원하는 속칭 ‘사이다 전개’를 유지하려면, 주인공은 항상 최대의 이득을 챙기는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양심과 도덕성을 지킨다거나 자신을 희생하려고 하면 바로 ‘고구마 전개’라며 독자들이 등을 돌리죠. 확실한 건 대중이 현실에서뿐 아니라 심지어 오락용 이야기 속에서도 손해보는 걸 곧 죽어도 싫어한다는 거예요.
문제는 또 너무 이기적인 선택만 하면 ‘쓰레기’가 돼버려서 정나미와 함께 독자들도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것. 이 때문에 김독자는 ‘주인공 보정’을 듬-뿍 받게 됩니다. ‘10분 안에 살해’ 미션을 받았는데 그 옆에 곤충채집 통을 들고 탄 아이가 있다거나(사람 대신 곤충을 죽여 미션 해결), 기껏 보스몹을 죽이고도 막타를 안 쳐서 고구마를 주나 싶다가도, 막타를 치면 저주받는다거나. 결국 윤리적이고 이타적인 선택을 하는 것 같지만 그게 다 돌고 돌아 득으로 돌아오는 식이죠. 김독자는 정보독점이란 지위를 이용해 이걸 다 알고 했고.
사이다 전개와 주인공의 도덕성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다. 이게 제가 꼽는 전독시가 성공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입벌려라 ‘국뽕’ 들어간다
세 번째, 국뽕. 반박시 당신 말이 옳습니다. 전독시 소설에선 일본판과 국내판에서 크게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화신이 일본 이토 히로부미의 화신을 쓰러트리는 장면이죠.
이 소설에서는 과거의 일이 재현되려고 할 때, 아무리 거스르려 해도 그대로 재현되려 하는 강한 외력(무대화)이 존재한다는 설정이 있습니다. 이 외력을 이용해 김독자는 강력한 일본의 화신을 쓰러트립니다. 절체절명 위기 끝에 울리는 일곱 발의 총성. 가슴이 웅장해질 수밖에. 국뽕이 치사량에 다다르는 지점은 이 부분 외에도 수두룩하게 나옵니다.
이순신 장군의 힘을 빌린 화신이 거북선을 몰고 적을 무찌른다거나, 한반도의 위인들이 김독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한마음으로 힘을 빌려줄 때. 그리고 고려제일검 척준경의 도움으로 김독자가 검으로 하늘을 가를 때. 이 정도면 다음 작가들이 더 이상 쓸 게 없을 만큼 싱숑(전독시의 작가)이 다 해먹은 게 아닐까.
여기서부터는 전독시와 관계없는 사족. 2018~2020년 전독시가 연재됐을 때와 비교해 오늘날 바뀐 것들. 독자들이 도덕성에 대해 이전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됐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주인공이 악랄하고, 살육에 미친 놈이라도 캐릭터가 매력 있고 개연성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 눈감아줍니다. 그리고 보통 이런 캐릭터일수록 사이다 전개에 유리하거든요.
웹소설뿐만 아니라 드라마만 봐도 그래요. 요새 나온 드라마 보세요. ‘하이퍼나이프’ ‘나인퍼즐’…. 전부 주인공이 사이코패스이거나 소시오패스거든요. 당장은 아니겠지만, 조만간 이런 주인공이 나오는 웹소설도 한 번 들고 오겠습니다.
끝으로, 영화 전독시는 5편까지 판권 계약이 체결됐다던데요, 간만에 에어컨 시원한 극장에서 김독자 일행의 고난을 지켜보며, 잠시 ‘성좌 체험’을 해보시는 건 어떠실지?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 메인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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