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블라이스 하우스 전경  [우] 블라이스 하우스 설립 당시의 주춧돌. “이 돌은 1899년 6월 24일에 여왕을 대신하여 웨일즈 왕자에 의해 놓여짐” / 사진. ©박소연
[좌] 블라이스 하우스 전경 [우] 블라이스 하우스 설립 당시의 주춧돌. “이 돌은 1899년 6월 24일에 여왕을 대신하여 웨일즈 왕자에 의해 놓여짐” / 사진. ©박소연
런던 서쪽 켄싱턴 구의 작은 테라스 하우스들로 둘러싸인 한적한 주택가를 걷다 보면 거대한 빅토리아식 건축물을 마주하게 된다. 이 건물의 이름은 블라이스 하우스(Blythe House)로 흥미로운 역사를 갖고 있다. 1899년에 착수하여 1903년에 완공된 이곳은 본래 영국 우체국의 저축은행 본사로 그 문을 열었다.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의 정부 기관 건축 프로젝트였고, 후기 빅토리아-에드워드 시대 양식으로 지어져 건축학적으로도 보존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건물은 거대한 직사각형 구조의 건물로 가운데 두 윙이 건물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지하 1층을 포함해 총 6개의 층으로 구성되어있다. 1903년 오픈 당시 약 4000명에 달하는 직원이 근무했고, 자가 전력 발전에 구내식당과 자전거 보관소까지 있는 상당한 기술과 복지를 자랑하는 건물이었다. 1938년에는 지하층은 전쟁 중 공습 대피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좌측부터] 블라이스 하우스 직사각형 구조 내부에서 바라본 건물 전경, 건물 내부 좌측에 두 대의 직원용 승강기, 직원 전용 출입구 / 사진. ©박소연
[좌측부터] 블라이스 하우스 직사각형 구조 내부에서 바라본 건물 전경, 건물 내부 좌측에 두 대의 직원용 승강기, 직원 전용 출입구 / 사진. ©박소연
1940년대까지 부분 증축과 보수를 거치며 건물은 확장되었고, 저축은행의 본사가 글래스고로 이전되며 1978년 건물 내부가 모두 비워졌다. 이후, 정부가 건물을 매입해 국립 박물관들의 수장고 및 복원 연구소로 용도를 바꾸었고 최근까지 대규모 박물관 수장고로써 사용되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영국박물관, 과학박물관, 그리고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이 이 건물을 크게 세 곳으로 나눠 각각 운영하였고, 일부는 대중들에게 오픈되어 수장고 투어를 진행하기도 했다.

1980년대 초반에 다수의 소장품이 이곳 블라이스 하우스로 옮겨졌고, 세 박물관은 소장품들을 용도 혹은 종류에 따라 분류하여 보관하기 시작했다. 영국박물관은 150만 점 이상, 과학박물관은 33만 점, 그리고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은 25만 점의 소장품과 35만 권의 아카이빙 자료를 보관했다.
소장품이 이동하기 전 가득 차 있던 블라이스 하우스. [좌] 과학박물관 내 컴퓨터 컬렉션 공간  [우]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내 아카이브 컬렉션 공간 / 사진. ©박소연
소장품이 이동하기 전 가득 차 있던 블라이스 하우스. [좌] 과학박물관 내 컴퓨터 컬렉션 공간 [우]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내 아카이브 컬렉션 공간 / 사진. ©박소연
우리가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전시 작품들은 대부분 전체 소장품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상태가 좋거나, 복원 및 검토 과정 등을 거쳐 전시될 준비가 완료된 소장품들만이 대중들에게 공개된다. 이 외의 대부분의 소장품은 박물관 내부 수장고에 보관되거나 이 블라이스 하우스와 같은 외부 수장고에 옮겨져 보관된다. 때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녔지만, 상태가 좋지 않아 대중들에게 공개되지 못한 채 영원히 수장고에만 보관되는 소장품들도 있다. 필요시 복원가와 큐레이터들이 수장고를 방문하여 연구하기도 하고, 외부 기관에 대여해주는 등 블라이스 하우스 또한 박물관들의 중요 허브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왜 박물관 내부에 영구적으로 보관하며 편리하게 관리하지 않고 외부 수장고를 굳이 이용하는 것일까?

영국의 박물관들은 여러 번의 증축과 보수를 통해 공간을 늘려왔지만 대부분 오래전에 지어졌기 때문에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집한 모든 소장품을 한 곳에 보관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본 박물관의 공간 외에도 도심을 벗어난 한적한 곳에 수장고를 새로 짓거나 다른 시설을 빌려 외부 수장고로 사용하는 경우가 상당수이다.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기 전 저축은행 건물로 쓰였던 시기에 블라이스 하우스는 다량의 실물 화폐와 문서, 계좌 등을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대한 양의 소장품들을 보관하기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또한 두 대의 직원용 승강기와 한 대의 대형 화물 승강기가 구비되어 있었기에 박물관의 소장품들을 다양하게 분류하여 보관하고 운반하는 데에 용이하였다.
블라이스 하우스의 소장품들이 빠져나간 뒤 텅 빈 공간들. [좌] 과학박물관 3층 선반  [우]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1층 공연 및 퍼포먼스 아카이브가 소장되었던 곳 / 사진. ©박소연
블라이스 하우스의 소장품들이 빠져나간 뒤 텅 빈 공간들. [좌] 과학박물관 3층 선반 [우]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1층 공연 및 퍼포먼스 아카이브가 소장되었던 곳 / 사진. ©박소연
하지만 수십년간 세 박물관의 소장품들을 보관해왔던 블라이스 하우스를 지난 2015년 정부가 매각하게 되며 박물관들은 대규모 이사 준비를 해야 했다. 매각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사실 블라이스 하우스는 1800년대 후반에 설계되었던 만큼 현대 기술의 시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소장품이나 유물을 보관하기에 더 이상 적합한 장소가 아니다. 당시 지어질 때만 해도 무적의 재료라 생각했던 석면이 다량 사용되기도 했고(석면이 위험물질로 등록된 이후 전면적 점검과 보수를 통해 모두 안전한 상태로 마감 처리되었다), 냉난방 시설이 낡고 기능이 원활하지 않아 내부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없었다. 또한 건물의 노후화와 누수 현상도 근본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정부의 매각 발표와 함께 세 박물관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약 10년에 걸친 장기적인 대규모 소장품 이동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좌측부터] 영국박물관의 BM_ARC / 사진 출처. 영국박물관 공식 홈페이지, 과학박물관의 Science + Innovation Park /사진 출처. 과학박물관 공식 홈페이지,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의 V&A East Storehouse / 사진 출처.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좌측부터] 영국박물관의 BM_ARC / 사진 출처. 영국박물관 공식 홈페이지, 과학박물관의 Science + Innovation Park /사진 출처. 과학박물관 공식 홈페이지,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의 V&A East Storehouse / 사진 출처.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공식 홈페이지
과학박물관은 잉글랜드 남부 윌셔 주의 로우튼이라는 곳에 있는 과거 영국 공군 기지를 보수 및 개조하여 새로운 개방형 수장고인 ‘Science + Innovation Park’를 오픈했다. 영국박물관은 영국 남부 레딩 근처에 영국 박물관 고고학 리서치 컬렉션을 새로 지어 모든 소장품을 온라인으로 열람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은 런던 동북부에 위치한 스트랏포드 올림픽 파크 내 이스트 스토어 하우스로 소장품을 모두 이동시켰다. 이는 2012년 런던 올림픽 당시 미디어 센터로 운영된 건물로 지난 5월 개방형 수장고로 개관했다.

이처럼, 약 10년의 기간 동안 세 박물관의 소장품은 각각 새로운 수장고로 이동을 마쳤고, 블라이스 하우스에는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블라이스 하우스의 새 역사를 쓸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유서 깊은 이 건물이 어떤 용도로 그 역할을 하게 될지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다.

박소연 테이트 미술관 수장고 코디네이터

참고
Historic England ▶ Blyth House (구 우체국 저축은행 본부) 건물 상세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