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바이오기업 A사는 유망한 신약후보물질 개발로 250억원의 중간단계(시리즈B) 투자를 받았는데도 최근 자금 경색에 임상을 중단하고 40여 명의 연구인력을 모두 내보냈다. 사무실도 수도권 외곽 지역으로 옮기고 대표 혼자 남은 ‘1인 기업’이 됐다.
한국경제신문사와 한국바이오협회가 15일 공동 주최한 ‘바이오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혁신 토론회’에서 전문가들은 자금 경색에 ‘법인세 비용 차감 전 당기순손실’(법차손) 등 규제까지 겹쳐 업계가 위기에 처했다며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 “법차손 규제 개선해야”
이날 참석자들은 대표적인 바이오 분야 규제로 법차손을 꼽았다. 3년간 2회 이상 자기자본의 50% 이상에 해당하는 법차손이 발생하거나 자본잠식률 50% 초과에 해당하는 상장사는 관리종목으로 지정된다.
15일 서울 구로동 넷마루스튜디오에서 한국경제신문사와 한국바이오협회 공동 주최로 열린 ‘바이오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혁신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토론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호준 이정회계법인 본부장, 권석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장, 이상엽 국가바이오위원회 부위원장,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 이병건 국제백신연구소한국후원회 이사장, 황만순 한국투자파트너스 대표. /임형택 기자
토론회에 참석한 정호준 이정회계법인 본부장(회계사)은 “법차손 상장 규제를 지키려 일부러 신약 개발 임상을 중단하고, 연구소 부지를 파는 곳도 많다”고 말했다. 상장을 유지하려면 법차손 요건을 지켜야 하는데, 신약 개발 관련 연구개발(R&D) 비용 투입이 늘어날수록 이를 어길 가능성이 높아 비용을 줄이려 주식, 부동산 등까지 팔게 된다는 것이다. 토론회 좌장을 맡은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법차손은 제조업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규제”라며 “장거리 마라톤 선수에게 단거리 규제를 일률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법차손 규제로 관리종목으로 지정되는 바이오기업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2024회계연도 기준 관리종목으로 지정된 기술특례 상장 바이오·헬스케어기업은 13곳으로 2022년(3곳)과 2023년(5곳)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 2018~2019년 기술특례 상장한 바이오기업들이 법차손 관련 유예 제도가 작년부터 끝나면서 대거 관리종목에 오른 것이다.
금융당국은 투자자 보호를 내세우며 법차손 규제를 고수하고 있다. 이상엽 국가바이오위원회 부위원장(KAIST 연구부총장)은 “몇몇 바이오기업 때문에 우량 바이오기업들이 이 제도로 피해를 본다”며 “정부가 법차손 규제를 풀고, 시장의 신뢰를 떨어뜨린 바이오기업엔 ‘일벌백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파격적 제도 변화 필요
바이오 연구의 혁신을 막는 여러 법적 규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병건 국제백신연구소한국후원회 이사장은 “일본은 첨단재생의료를 육성하기 위해 재생의료 희귀질환인 경우 임상 1상 후 바로 조건부 허가를 내주는 파격적인 법안을 만들기도 했다”며 “국내에서도 전향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국가 차원에서 바이오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제언도 있었다. 이 부위원장은 “젊은 연구원의 이탈을 막기 위해 파격적인 성과보상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석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원장은 “작년 연구개발(R&D) 예산이 30%가량 삭감됐다”며 “인재 확보를 위해 연구비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바이오협회는 이날 토론회를 통해 △법차손 등 상장 규제 개선 △ R&D비용 등 회계 규제 개선 △R&D 예산 합리적으로 증액 △초기 벤처 펀드 확대 및 단계별 연결형 투자 확대 △거래소 심사 및 인허가 속도 개선 △거래소 상장 심사 일정 및 조건 개선 △식약처 심사 및 인허가 속도 개선 △장기적인 바이오 지원 정책 수립 및 정책의 일관성 확보 △인력양성 확대 △공급망 안정화(소부장 및 원료의약품 자립화) △국가간 통상 및 인증 협력, 규제 조화 등 글로벌 진출 지원 강화 등 10대 과제를 제시해 여야 대선 후보에게 전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