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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경에세이] 법에 갇힌 '쌀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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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식 농협대 교수
    [한경에세이] 법에 갇힌 '쌀의 위엄'
    대학 다닐 때 1주일간 ‘전방부대 입소 교육’을 받았다. 당시 철책 근무 때 들은 대남방송 한 대목이 기억난다. “남조선 대학생 여러분! 얼마나 배가 고프십니까. 우리 인민군 병사들은 오늘도 하얀 쌀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1981년 여름, 나는 이 방송을 듣고 북한이 남한보다 못 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는 배가 고프지 않았고 ‘하얀 쌀밥’에도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불붙기 시작한 녹색혁명의 여파로 쌀 생산이 늘어났다. 당시 유통되는 쌀은 통일벼 계통의 ‘정부미’와 재래종 계통의 ‘일반미’로 구분돼 있었다. 정부미는 맛이 안 좋아 인기가 없었고 일반미는 맛있어 비싼 값에도 잘 팔렸다. 하얀 쌀밥도 미질을 따져가며 가려서 먹을 때였다.

    그 이전에는 쌀이 늘 부족했다. 춘궁기, 보릿고개라는 말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8년 양곡매입법이 공포된다. ‘농민의 자가 소비 분을 제외한 모든 양곡은 반드시 정부에 매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양곡의 사적 거래와 국외 유출을 막기 위함이었다. 무단으로 양곡을 해외로 반출할 경우 사형까지 처한다는 조항을 보면 당시 식량 사정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 양곡매입법이 1950년 양곡관리법으로 대체됐다.

    이제는 쌀이 남아서 문제다. 생산이 줄지 않은 탓도 있지만 주된 원인은 밥을 먹지 않아서 그렇다. 1990년만 해도 120㎏이던 성인 한 명당 1년 쌀 소비량이 지금은 56㎏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쌀값은 해마다 떨어지고 농민의 시름은 깊어만 간다. 그래서 이제는 ‘정부 의무 매입’이라는 팻말을 들고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세상에 나왔다.

    농민을 위해서 더 이상 소비되지 않고 남는 쌀은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자는 야당과 이렇게 하면 예산이 많이 들고 무엇보다 쌀 생산이 줄어들지 않아서 공급 과잉을 해소할 수 없다는 정부·여당이 2년째 맞서고 있다. 양곡관리법이 단진자처럼 여의도와 용산을 오가는 사이 쌀은 주곡의 위엄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미국에는 농산물 가격손실보상제도(PLC)라는 게 있다. 쌀의 경우, 기준가격을 설정하고 시장가격이 기준가격 이하로 떨어지면 그 차액의 일정부분을 생산자에게 보상하는 제도다. 이것을 우리 실정에 맞게끔 잘 고치면 쌀 문제 해결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쌀 소비를 늘리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45년 전, 철책 근무의 추억을 떠올리며 혼잣말을 해본다. “북한 주민과 군인 여러분! 우리는 하얀 쌀밥을 잘 먹지 않아요. 필요하다면 가져다 드시고 그 대신 미움의 총부리는 거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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