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전 '웹툰 작가'…아버지의 원수 갚은 사연이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영국 사회를 적나라하게 그린 화가
윌리엄 호가스(1697~1764)
무단 복제와 맞서 싸워
가난 딛고 거장이 된 사연
윌리엄 호가스(1697~1764)
무단 복제와 맞서 싸워
가난 딛고 거장이 된 사연

남자의 아버지는 그들에게 평생 쌓아온 성과를 빼앗기고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수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그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그 남자, 윌리엄 호가스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이들의 정체는 출판업자들. 그들은 아버지의 책을 무단 복제해 헐값에 팔아, 아버지의 꿈과 평생의 노력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그러고도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을 만큼 그들의 힘은 강력했습니다. 반면 호가스가 가진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호가스는 싸워야 했습니다.
악착같이 노력한 끝에 결국 그는 아버지와 같은 불행한 사람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세상을 바꾸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호가스가 살던 18세기 영국 사회의 명암을 영원히 세상에 남긴 위대한 화가가 됐습니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세계 최초의 ‘미술 저작권법’을 만든 영국의 미술 거장, 호가스의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아버지는 왜 감옥에 갇혔나
호가스의 아버지인 리처드 호가스는 학자이자 선생님이었습니다. 잉글랜드 촌구석 출신인 리처드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런던으로 건너온 인물. 가슴 속에는 언젠가는 서양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로 성공하겠다는 큰 꿈이 있었습니다. 비록 가난했지만 리처드에게는 재능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어 외에도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했고 여러 서양 고전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인품도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리처드의 계획은 출판업자들의 횡포에 모두 망가졌습니다. 업자들은 책이 팔려도 제대로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리처드가 항의하자 업자들은 오히려 버럭 화를 냈습니다. “시끄러운 놈이군. 본때를 보여줘야겠어.” 업자들은 몰래 그의 책을 복제해 헐값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리처드가 심혈을 기울여 야심 차게 쓴 라틴어 사전의 원고도 책으로 내주지 않았습니다. 업자들의 이런 ‘갑질’을 막는 어떤 법도, 윤리도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결국 리처드는 파산 상태에 이르렀고, 빚을 졌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의 돈을 떼먹는 악질 범죄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감옥에 보내야 하는 게 맞겠지요. 하지만 당시 영국은 빚을 조금이라도 갚지 못하는 사람은 모조리 ‘채무자 감옥’에 가둬버리는 어이없는 제도를 시행 중이었습니다. 실상은 더 황당했습니다. 빚이 있으면 전부 감옥에 보내버리는 탓에 런던 감옥은 수만 명의 죄수로 넘쳐났습니다. 결국 열악한 환경에서 매년 수백~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감옥에서 나오려면 돈을 갚으면 되는데, 갇혀 있는 상황이니 도저히 돈을 벌 방법이 없습니다. 멀쩡한 사람들을 그냥 가둬두기만 하는 그야말로 최악의 제도였습니다.

흙수저 청년의 성공기
아버지가 이런 꼴을 당했으니 집안 형편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더럽고 시끄러운 빈민가에서 자란 호가스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호가스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총명한 젊은이였고, 자기 주관이 뚜렷했습니다. 성공을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알아채는 감각과 실행하는 결단력도 탁월한 수준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사업가 기질이 있었다는 얘깁니다.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그는, 열여섯 살 때 아버지의 빚을 갚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은을 세공하는 공방에 연습생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곳에서 호가스는 은 접시나 장신구를 깎아 복잡한 문양을 새기며 5년간 기본기를 닦았습니다. 그리고 호가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지루해. 게다가 돈이 안 된단 말이야. 다른 일을 찾아야겠어.’

고민하던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판화였습니다. 동판에 모양을 새겨 여러 장의 그림을 찍어내는 동판화는 당시 런던에서 막 유행을 타기 시작하던 참이었습니다. 비싸고 제작 기간도 오래 걸리는 사치품이었던 일반적인 그림과 달리, 판화는 싼값에 찍어낼 수 있어 서민들도 충분히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잘만 하면 대량으로 찍어내서 큰돈을 벌 수 있겠다.’ 호가스는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금속에 뭔가를 새기는 것’은 지난 세월 그가 연마해온 주특기였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그려야 할 것인가. 호가스의 머릿속에 그가 나고 자란 런던 빈민가의 번잡한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소매치기가 판치는 시장, 주정뱅이들이 비틀대는 술집 앞, 주먹이 날아다니는 뒷골목 등 도시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생생한 모습은 비록 고상한 아름다움은 없지만 나름의 활기와 유머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주제를 그리는 다른 화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여기에 호가스는 용돈을 모아 휴일에 가끔 구경하던 연극의 요소를 섞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그가 그릴 그림은 정해졌습니다. ‘서민들의 삶을 비롯한 영국 사회를 이야기 형식으로 솔직하고 재미있게 표현한, 값싸고 대중적인 판화’.

최초의 미술 저작권법 만들다
아버지를 파멸로 내몬 출판업자들은 이번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호가스의 작업을 훔치려 했습니다. 호가스의 판화를 무단 복제하기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호가스는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의 원수인 출판업자들에게 한 방 먹여 주고,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을 때가 왔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호가스는 뜻을 같이하는 예술가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동료 예술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림도 돈이 있어야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쇄업자를 비롯한 엉뚱한 사람들만 우리의 재능에 기생해서 이익을 보고 있어요. 이런 일이 계속되면 실력 있는 사람들도 그림을 그리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 영국의 미술도 몰락할 겁니다. 반대로 우리의 권리가 보호된다면 영국 미술의 위상은 올라갈 거에요. ‘그림을 잘 그리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보장이 있으면 더 많은 사람이 미술에 뛰어들 것이고, 소비자는 더 좋은 그림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선택의 폭이 넓어질 겁니다.”


그리고 호가스가 서른여덟 살이던 1735년 마침내 세계 최초의 미술 저작권법이 통과됩니다. 호가스라는 개인의 통쾌한 승리이자 ‘문화 강국’ 영국의 토대를 만든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다른 나라에서도 이 법을 참조해 비슷한 법을 제정하면서, 호가스의 업적은 오늘날 예술가의 권리 보호의 토대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약점이라는 콘텐츠
물론 그의 삶이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닙니다. 호가스의 전기 곳곳에는 그가 열등감에 시달렸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집안이 가난해서 어린 시절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던 것, 귀족적인 화풍에 상대적으로 약했던 점, 유학을 다녀오지 않았다는 점이 모두 그에겐 콤플렉스였습니다. 말년에는“사실 내가 되고 싶었던 건 판화가가 아니라 고상한 역사화가였다”고 불평하곤 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당시 미술계에는 ‘역사화가 가장 고상한 것이고, 판화는 극히 서민적인 예술’이라는 통념이 퍼져 있었으니까요. 당시 정통 귀족 미술의 일인자이자 왕실 초상화가였던 조슈아 레이놀즈에게 불필요한 라이벌 의식을 불태웠던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막 판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을 무렵, 호가스는 실력을 더 키우고 인맥을 쌓기 위해 왕실 화가였던 제임스 손힐의 제자가 됐습니다. 그렇게 스승의 집을 들락거리며 그림을 배우던 호가스. 스승의 딸인 제인과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두 사람은 결혼을 허락받으려고 했지만, 스승은 반대했습니다. 호가스가 가난한 집안 출신인데다 아직 명성도 변변찮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자 호가스와 제인은 허락받지 않고 결혼식을 올려 버립니다. 당연히 스승은 길길이 뛰었습니다.

그 밖에도 호가스는 여러 방면에서 성공을 거뒀습니다. 왕실의 회화와 장식을 총괄하는 ‘서전트 페인터’ 직위를 맡기도 했고, 지금으로 따지면 연 3억원 이상(당시 1000파운드)의 수입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나 프랑스 등 외국 화가만 인정하고 자국 화가들은 무시하는 영국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가 하면, ‘아름다움의 분석’이라는 미술책을 써서 자신의 미적 철학을 사람들에게 알려줬습니다. 가난했던 시절을 잊지 않고 여러 병원과 복지관에 큰돈을 기부한 것도 그의 중요한 업적으로 꼽힙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청년이었던 그는, 영국 미술의 한 분야를 대표하는 거장이자 사회의 어른으로 세상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성취는 그가 자신의 약점과 한계를 직시하고 필요할 때마다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덕분이었습니다. 예컨대 미술 저작권법 제정이라는 업적은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아버지의 고통에서 나왔고요. 호가스에게 부와 명성을 가져다줬던 판화 예술은 그가 가난한 흙수저 출신이 아니었다면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호가스가 겪은 결핍이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엘리트 ‘도련님 화가’들을 제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겁니다.
극복할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고난은 그 누구보다 든든한 자신만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호가스의 삶은 말해주는 듯합니다.

**이번 기사는 William Hogarth: A Life and a World(Jenny Uglow 지음)과 Hogarth: The Artist and the City(Mark Hallett, Christine Riding)를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